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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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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빈

다른 표기 언어 우빈 , 于斌 동의어 관우, 冠五, 씨웨, 希岳, 예성, 野声,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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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1년 4월 13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란시현(蘭西縣)
사망 1978년 8월 16일
국적 중국
주요활동 1935년 중화전국공교진행회 제1차 대회 비서장, 1938년 국책자문기관 국민참정회 참정원, 국민정부 행정원 진재위원회 위원, 1940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참석, 한국독립운동 관련 행사 후원, 1943년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만나 임시정부 승인문제 협의,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 참석, 한국대표단 회의 참석 지원
포상훈격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한협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901년 4월 13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란시현(蘭西縣)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관우(冠五), 호는 씨웨(希岳)라고 하다가 예성(野聲)이라고 하였다. 천주교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1912년 조부모를 따라 천주교 촌락인 하이룬현(海倫縣) 뤄써둔(若瑟屯)으로 이사하여 14세에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파리외방전교회 앙리 루뱅 신부(Rev. Henri Roubin, 陸恒厘)의 지도로 하이룬현의 고등소학교를 거쳐 1916년 헤이룽장성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위치한 제1사범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5・4운동이 전개되자, 학생단장으로 추대되어 가두연설 등을 전개하였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체포를 피해 뤄써둔에 가 있기도 하였다.

중국 추기경 위빈(于斌),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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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지린(吉林)에 있는 신학교인 선뤄학원(神羅學院)에 입학하여 라틴어 등 기초과정을 배우고, 천주교 예수회에서 설립한 상하이(上海) 소재 전단학원(震旦學院) 예과에서 프랑스어를 1년 수학하였다. 그리고 지린으로 돌아와 선뤄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다가, 1924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우르바노대학(Pontificia Università Urbaniana)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하였다. 1925년 성 토마스 데 아퀴노대학(Pontificia UniversitàSan Tommaso d’Aquino)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8년 12월 2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9년에는 우르바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가을부터 중국문학 교수로 일하였다.

1933년에는 중국철학과 중국문화사, 중국전교학을 가르쳤다. 1933년 이탈리아 국립페루지아대학(Universitàdegli Studi di Perugia)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마에서 10년을 수학하며 철학 ・ 신학 ・ 정치학의 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던 것이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교황청 도서관에서 중문부의 서목과 자료 등을 정리하며,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중국의 고서들을 읽고 연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어려서 유교경전을 공부하여 중국문화의 기본정신을 이해하였으며, 천주교인이면서도 중국문화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서양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그의 종교사상이 유교에 가깝고 공통점이 많다는 평가도 그러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을 실천하고자 한 벨기에 출신의 뱅상 레브 신부(Rev. Vincent Lebbe, 雷鳴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것 같다.

1933년 11월 귀국하여 12월 주중교황청대표부의 비서와 중화전국공교진행회(中華全國公敎進行會) 총감독(總監督), 푸런대학(輔仁大學)의 이사장과 윤리학 교수를 겸하였다.

1935년 9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중화전국공교진행회 제1차 대회에서 비서장에 선출되어 비행기헌납운동을 발기하였다. 이 일은 천주교인들의 애국심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이 비애국적으로 인식하던 천주교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36년 7월 17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난징대목구(南京代牧區) 주교에 임명하여 9월 20일 베이징(北京)에서 축성식을 가졌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교구의 사제와 교우들에게 ‘기도화평(祈禱和平)’과 ‘준비응전(準備應戰)’을 강조하였다. 10월 홍콩을 거쳐 유럽으로 가 국제사회에 항일전쟁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12월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30여 대도시에서 130회의 강연과 방송을 통하여 국제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파리 ・ 런던 ・ 로마 ・ 스위스에서 활동하였으며, 헝가리에서 개최된 성체대회에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후 베트남을 거쳐 1938년 7월에 귀국하였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을때,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항일전쟁 지원과 난민구제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38년 국민정부가 국론통일과 국력결집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초당적인 형태로 설치한 국책자문기관인 국민참정회(國民參政會)의 참정원에 선임되는 등, 천주교의 대표로 국민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38년 12월 국민정부 행정원의 진제위원회(振濟委員會) 위원에 취임한 뒤 위원회를 대표하여 미국의 원조에 사의를 표하기 위하여 1939년 1월 출국하여,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난민구제를 위한 모금활동과 강연 등을 계속하였다.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 돌아올 때까지 10개월간 미국 전역을 순방하였다. 1939년 2월 익세보종교여문화사(益世報宗敎與文化社)가 편집하여 진리학회가 『위빈주교항전언론집(于斌主敎抗戰言論集)』을 홍콩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전개한 항일활동 언행이 잘 드러나는 서적으로, 국내외에서의 공문과 연설, 그리고 인터뷰 등이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였다. 항일국제활동은 국민정부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제스(蔣介石)는 우호국에 대한 민간외교를 그에게 맡겼다고 할 정도였다.

전시 문화에 대한 관심은 천주교회에서 발행하다가 중일전쟁 이후 발행되지 못하고 있던 『익세보(益世報)』를 복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중국천주교문화협진회를 조직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3년 5월에 창립된 중국종교도연의회(中國宗敎徒聯誼會)의 창립에도 깊게 관여하여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1943년 3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워싱턴에서 미국인의 대중국 이해를 촉진시키고자 중미문화학회를 창립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의 확대를 요구하였다. 아울러 중국 동북문제, 즉 만주문제에 대하여 미국의 조야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미국정부에 이민법의 개정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미국 상 ・ 하원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1944년부터 매년 105명의 중국인의 이민과 영주권 취득이 허가되었다. 1945년 4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민간대표로 참가하였다.

티앤껑신(田耕莘) 주교 관저에서 찍은 사진(1946년 6월 8일)

앞줄 왼쪽부터 于斌 ・ 莫德惠 ・ 田耕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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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1946년 4월 중국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자 대주교로 승품하여 난징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1월 제헌국민대회 대표에 당선되어 주석단에 선출되었고, 1948년 1월 제1기 국민대회 대표로 역시 주석단에 추대된 바 있었다. 그러한 국민정부와 연계된 정치활동으로 ‘정치주교’로 알려졌고, 중국공산당은 1949년 2월 베이징을 점령한 뒤 그를 후스(胡適) 등과 함께 ‘문화전범(文化戰犯)’으로 선포하였다. 그만큼 그는 반공의 색채가 강하였다.

1949년 7월 교황청의 지시로 대륙을 떠나 타이완(臺灣)으로 갔다가, 10월 남미 21개국을 방문하여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자유중국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옮겨 1959년까지 주로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타이완과 한국 ・ 일본 ・ 베트남 등 아시아 각지를 비롯하여, 유럽 등지를 다니며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4년 2월 타이베이(臺北)에서 개최된 제1기 국민대회 제2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중국천주교문화협진회 이사장을 계속 맡았고, 방한하여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등을 만났다. 1955년에는 뉴욕에서 자유태평양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56년에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의 앙양을 목적으로 ‘자유태평양운동(自由太平洋運動)’을 발기하였다.

1959년 교황청에서는 타이완에 푸런대학을 재건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맡겨 교장(校長)에 임명하였다. 1960년 2월 제1기 국민대회 제3차 회의에서도 주석단에 당선되었고, 1962년 광복대륙설계위원회 부주임위원을 맡아 여전히 국민당 정권에 깊이 협력하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1969년 4월 28일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중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78년 8월 6일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교황의 장례식과 신임 교황 선출을 위하여 바티칸에 가 12일 교황의 장례미사 중에 쓰러졌다가 결국 8월 16일 선종하였다. 8월 18일 성 베드로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있었고, 유해는 8월 26일 타이완으로 운구되어 28일 장례식을 치루고 타이베이에 가까운 신좡(新莊)에 위치한 푸런대학 교내에 묻혔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11월 총사령부가 시안(西安)으로 이전하게 되자, 11일 저녁 익세보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총사령부관계 인사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가 ‘협양정기(協揚正氣)’라고 쓴 깃발을 임시정부에 선물하자, 김구(金九)는 ‘정의사자(正義使者)’라고 수를 놓은 비단기를 전하였다. 1940년대 초 충칭에 머물고 있을 때는 한국독립운동 관련자들의 행사나 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후원하였다. 1942년 10월 11일 발족한 중한문화협회에도 명예이사로 참가하였다. 아울러 1941년 말부터 중국정부와 각계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극력 찬동하였다.

충칭 가릉빈관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194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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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할 때는 이승만을 여러 차례 만나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협의한 바 있었다. 1944년 5월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임원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져, 한국독립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1944년 8월 29일 한미협회가 제34주년 국치기념식을 뉴욕 아스토리아호텔에서 개최하자 참석하였으며, 1944년 9월에 귀국하여 바쁜 일정 중에도 중국천주교문화협진회 이사장 자격으로 충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한교(韓僑)생활위원회에 5만원을 기부하여, 학령아동과 노약자, 병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중국 민간대표의 자격으로 참가하여 한국대표단의 회의참석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뒤, 1945년 10월 29일 중한문화협회 성립 3주년 기념회 및 한국혁명지도자 환국 환송회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 초청을 받았으나 참석하지 못하였고, 1954년 4월 이승만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1959년 5월과 1961년 2월, 그리고 1969년 8월과 1976년 4월, 모두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위빈 대주교의 한국 방문(1959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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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0년 전후 한국독립운동과 연결된 이후, 깊은 애정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대표적인 중국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한인사회에서는 ‘정의사자’로 부르며 한인의 대표적인 친우로 대접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임시정부를 항일전쟁의 동지로 인식하고,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이나 행사 등에는 적극 참여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였다. 350만 중국천주교인들에게 한국독립을 후원하라고 하였다는 것을 비롯하여, 임시정부가 중국정부의 협조를 필요로 할 때 민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임시정부 승인문제나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문제 등에서 그러한 협조와 지원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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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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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張興唐, 「于斌樞機傳」, 『于斌樞機紀念文集』, 臺北, 康寧雜誌社, 1981
  • ・ 雷震遠, 「于斌總主敎小史」, 『于斌傳記資料』 2, 臺北, 天一出版社, 1985
  • ・ 『于斌樞機畫傳』, 臺北, 輔仁大學出版社, 1998
  • ・ 于斌, 『于斌主敎抗戰言論集』, 香港, 眞理學會, 1939
  • ・ 顧衛民, 『中國與羅馬敎廷關係史略』, 北京, 東方出版社, 2000
  •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1-A00753 「김구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 ; 『신한민보』 ; 『동아일보』 ; 『독립신문』(중경판) ; 『경향신문』 ; 石源華, 『中韓文化協會硏究』, 北京, 世界知識出版社, 2007
  • ・ 韓詩俊, 「중한문화협회의 성립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5, 2010
  • ・ 최기영, 「우빈(于斌) 주교와 한국독립운동」, 『교회사연구』 4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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