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조지 루이스

다른 표기 언어 George Lewis Shaw 동의어 소지영, 蘇志英
툴바 메뉴
요약 테이블
출생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
사망 1943년 11월 13일
관련 사건 조선총독부의 쇼 체포사건
국적 영국
주요활동 1919년 이륭양행 내 임시정부의 안동교통지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인적 ・ 물적 자원을 안전하게 운반하도록 지원, 임시정부와 국내 ・ 만주지역을 연결해주는 안전통로이자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요새 혹은 국내 전진기지 역할 제공
포상훈격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관련 인물/단체 이륭양행, 임시정부, 교통사무국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의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에서 아버지인 영국 아일랜드계의 사무엘 루이스 쇼(Samuel Lewis Shaw)와 어머니 일본인 엘렌 오씨(Ellen Oh’se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자명은 소지영(蘇志英)이다.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 국가보훈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10대 초반에 선원으로 동양을 방문한 뒤 줄곧 마카오 ・ 인도 ・ 중국 등지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1868년부터 파고다 아일랜드에 정착해서 무역 화물의 손해정도 및 원인을 검사하는 해사검정인(海事檢定人)으로 활동하였다. 20대 초반인 1900년경 한국의 금광(평남 은산금광 추정)에서 회계로 근무하면서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다. 1907년경 중국 안둥현(安東縣)으로 옮겨 영국 조계에 위치한 현재 단동시(丹東市) 원보구(元寶區) 흥륭가(興隆街) 25호에 무역회사 겸 선박 대리점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하였다. 1912년 일본인 사이토 후미(齊藤ふみ)와 결혼했고, 아들 2명을 낳았다. 1938년 안둥을 떠나 푸저우에 이륭양행의 본점을 설치하고 석유 판매 등 사업을 벌였으나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1943년 63세로 사망하였다.

쇼의 부인 사이토 후미

ⓒ 국가보훈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둥에서 약 5만 평의 광대한 토지의 영구임대권을 얻어 제재공장을 운영함과 동시에 기선회사를 만들어 운송업 ・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때문에 경쟁 상대였던 일본인들로부터 시기뿐 아니라 축출 공작을 받았다. 또한 영국의 극동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상하이 상공회의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14년경 상하이(上海)에서 일본상품배척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일본인과 사업상 거래하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일제의 방해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체로 반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강렬한 반일감정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일랜드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한국독립운동에 호감을 갖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 이륭양행 소속의 선박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로 가는데 안전과 편의를 봐주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를 비롯한 15명의 동지가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황해안을 지나갈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배를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 4일 후 무사히 상하이 황포강 포동(浦東)에 내려주었다고 한다.

김구뿐 아니라 김가진 ・ 이광수 ・ 박헌영 ・ 김산 등 국내와 상하이를 오고 갔던 독립운동가들 중 이륭양행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20년 5월 중순 안둥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이 계림호에 타고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일청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에게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인 바, 다수의 한국인 지기들로부터 그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를 받았을 때는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고 공언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1919년 5월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활발하게 취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곧이어 국내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인 안둥에 안동교통지부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그 장소는 바로 구시가 흥륭가에 있던 이륭양행 2층이었다. 6월 1일 임시정부에서 통신 및 연락기관원으로 이륭양행 등지에 파견했던 김취곤이 체포된 사실 등이 있다. 이로 미루어 그 이전에 이미 임시정부의 통신원이 이륭양행으로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동교통지부 교통국은 국장이 관할하는 금전모집과 ・ 통신과 ・ 인물소개과가 있었으며, 그 아래 교통소를 두었다. 안동교통지부는 애초에 국내 각 군과 면에 교통국과 교통소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19년 10월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관할구역도 평안남 ・ 북도와 황해도에 국한되었다. 뒤에는 만주지방의 통신업무도 관장했는데, 이를 통신국으로 불렀다. 교통사무국은 정부의 자금모집, 국내의 정보수집 보고, 정부 지령 ・ 서류의 국내 전달, 교통국의 조직 및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 소개와 연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한글활자 ・ 한국지도 ・ 무기 ・ 탄약 등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통사무국이 펼친 활동의 중심에는 이륭양행이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뿐 아니라 의열단(義烈團)을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의열단은 비밀리에 200개의 폭탄을 상하이에서 한국에 들여올 때, 이륭양행 소유의 기선에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륭양행 앞으로 보냈다. 직접 상하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면서도 한 푼도 받지 않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의열단원들은 몇 년 동안 자신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안둥에 있는 그의 집에 숨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쇼

ⓒ 국가보훈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인적 ・ 물적 자원을 안전하게 운반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륭양행이 일본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던 치외법권지역이었던 점을 활용해서 적극 지원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제가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국내 ・ 만주지역을 연결해주는 안전통로이자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새’ 혹은 ‘국내전진기지’로서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로 말미암아 안둥의 일본영사관과 경찰서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그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져 줄곧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 7월 11일 일본에서 오는 처자를 맞이하기 위해 안둥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갔다. 이때 일본영사관 및 경찰서 ・ 신의주경찰서 ・ 총독부 경무국은 독립운동을 근절시킬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계획적으로 그를 체포하였다. 일제 측은 표면상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것을 우연히 검문해서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여름방학마다 처자를 맞이하러 국내로 들어왔던 사실을 일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사재판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안둥 주재 일본영사관 이리에 쇼타로(入江正太郞) 영사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가 뒷날 외교문제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그는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직접 “이 기회를 놓치면 도저히 쇼의 죄상에 관해 철저하게 취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서 이에 동의했던 사정이 있다”고 자인하였다. 이어 “만일 쇼가 무죄라고 할 경우 정책상 달갑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해서 대외적으로 본관이 전혀 쇼 체포를 알지 못했다는 점을 당돌하게 다짐해두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치외법권의 대상인 사람을 체포하여 법률상 하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영국의 반발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총독부 등 관계 기관 내에서도 이를 둘러싸고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법국 검사장은 법률적으로 무리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외국에 관계된 일이어서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 정무총감도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간단하게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지 않느냐”고 말함으로써 경무국장의 의견대로 구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일제는 이를 기회로 임시정부의 활동을 발본색원할 ‘가장 좋은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위해 대통령 이승만을 포함해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부장 이동녕,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임시정부의 각료 전부 및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주요인물 모두와 엮어 내란죄로 기소하였다.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는 임시정부의 방침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이륭양행 내에 임시안동교통 사무국을 설치하도록 하거나 기선을 제공해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해줌으로써 내란행위를 방조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와 달리 외무성을 포함한 일본 내각은 쇼의 법적 근거가 빈약하며 이로 말미암아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을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예상대로 영국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은 쇼 체포를 극동지역 거주 영국인의 지위 및 위신에 관한 문제로 매우 중대시해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쇼 사건은 중국에서 이권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서구 열강의 영사재판권 행사와도 직 ・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중국내 영자신문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특파원들에 의해 영국의 『런던 타임즈(London Times)』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갔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수뇌부는 직접 조선총독 등을 설득한 끝에 4개월 여 만인 11월 19일 쇼를 보석으로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영국은 쇼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보증금의 반환을 요구해서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체포와 석방 과정에서 반일 감정이 확산됨과 동시에 일제의 한국지배에 대한 부당성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쇼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된 후에도 이륭양행의 사무원 김문규에게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독립에 호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1920년 11월 옥고를 치룬 뒤 주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안둥으로 돌아온 후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원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해 말 일본 요코하마(橫濱) ・ 도쿄(東京)로 건너가 두아들을 중국 푸저우로 보내 신변의 안전을 꾀했으며, 주일 영국대사관을 방문해 구속으로 발생한 손해 배상 건을 협의하였다. 이어 1921년 1월 26일 상하이로 가서 이승만 ・ 안창호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마련한 환영연에 참석해 금색공로장을 받았으며, 안동교통사무국의 재흥 등 장래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구속된 자신을 비방했던 상하이 『원동시보(遠東時報)』의 발행자와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손해배상을 미국영사관 법정에 청구하였다.

1921년 5월 약 4개월 만에 안둥으로 돌아온 뒤 겉으로 한국인과 관계를 끊고 근신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실제로 김문규를 이륭양행 직원으로 채용해서 안동 교통사무국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힘썼다. 그 결과 이륭양행에 거주하는 강경성 등을 안전하게 도피시키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은닉해주는 등 안동교통사무국은 독립운동가의 운송 ・ 보호 및 소개에 전력할 수 있었다. 이륭양행 내 안동교통사무국과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연합회가 김문규에게 소개해 이륭양행에 머물렀던 최준 ・ 오인석 등은 안둥 우체국에 수신함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은닉처를 제공하였다. 이륭양행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사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보관 ・ 전달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이에 펑톈(奉天, 현 심양) 주재 영국영사가 이륭양행 내 독립운동가들의 잠복여부를 조사하러 왔을 때에도 기지를 발휘해 그의 의심을 풀어준 적도 있었다. 아울러 압록강 입구의 대동구 부근 토지를 장기 임대하는 등 안둥지역에서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일본인 사업가들과 경쟁을 펼쳤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 만주 지역 독립단체들 간의 비밀 통신 및 정보 수집, 각종 임시정부 관련 책자 및 홍보물 전달 등 통신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통신은 일단 개봉한 후 그 봉투를 바꾸어 각각 발신하고, 인쇄물은 국내 또는 서간도 방면으로 배포되었다. 이륭양행 앞으로 발송된 인쇄물에는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 『독립신문』 등을 비롯해서 각종 독립운동단체가 보낸 「중한협회선언서(中韓協會宣言書)」 등이 있었다. 또한 김문규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둥의 재산가들에게 독립공채를 팔려고 했으나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문규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보안의 정도가 낮은 『독립신문』 등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서 일본의 밀정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안동교통사무국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922년 8월 일제는 김문규를 체포하였다. 이에 김문규를 보석으로 석방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외교문제로 삼았다. 그의 처 후미 역시 김문규의 부친에게 가족의 보호를 보장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주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 측도 이 사건을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김문규의 인도와 당사자의 처벌 및 사죄를 요구하는 항의서를 일본영사에게 보냈다.

김문규 체포로 안동교통사무국이 실질상 해체됨으로써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는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륭양행에 대한 일제의 감시도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1923년 2월 중순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 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도모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금이 부족하여 독립운동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면, 자신이 소련대사 카라한을 방문해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겠다고 하였다. 일본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재만 독립운동가들을 비호하고 동만주 및 상하이간 독립운동가들의 교섭을 개시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또 불일(佛日) 양국의 불화를 강조해 한국인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한편 1923년 의열단은 국내 거사계획을 추진하면서 이륭양행을 이용했고, 임시정부 요원들도 이륭양행의 선박으로 폭탄 등의 무기를 운반한 뒤 이륭양행을 통해 통의부 ・ 정의부 등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운송하였다. 1924년 초에도 통의부에서 요구한 국내 진입용 모젤 권총을 구입해주었으며, 4월에 만기 출옥한 김문규를 다시 이륭양행의 직원으로 고용하였다. 1925년 5월경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이륭양행에 근무했던 김승빈이 모종의 사명을 띠고 서울로 파견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 초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간인을 사주해서 아내 후미의 오빠를 통하여 이륭양행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25년에 자신의 선박과 일본 회사의 충돌사건으로 일본인과 마찰을 빚자 손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제는 오히려 이륭양행 소유 선박의 선원들 중 중국인 무자격자가 있는 약점을 꼬투리 잡아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가 점차 위축되고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면서 사업을 운영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침략을 계기로 일제는 이륭양행의 기선들을 불법으로 검문하고, 부인에게도 체포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등 적극적인 탄압정책을 펼쳤다. 이에 직접 혹은 영국총영사 ・ 주일 영국대사관을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일제는 치안유지를 이유로 만주 측 관헌을 앞세워 공동 검문하는 편법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반관반민의 어용 회사인 대안기선공사(大安滊船公司)를 설립하고 이륭양행을 매수하려고 시도하였다. 국제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는 쇼의 압록강 항로권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안기선공사에 상당한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이륭양행과 경쟁토록했던 것이다. 일본영사조차 이를 졸렬한 ‘쇼 박멸’ 조치라고 여길 정도였다. 결국 1935년 2월 이륭양행의 선박과 압록강 항로권 등은 기선공사에 매도되고 말았다.

그 뒤 안둥과 상하이 간의 운송업에 주력하면서 압록강의 화물운송업에도 새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선박 억류 등 일제의 축출 공작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1938년 4월 안둥을 떠나 푸저우에 이륭양행의 본점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1907년경부터 약 31여 년간 안둥에서 일제의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전개했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반일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가 그토록 감시 ・ 압박하면서 축출하려고 애썼던 안둥의 ‘트러블 메이커’이자 목구멍의 가시였던 쇼의 안둥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푸저우에서도 석유 판매 등 사업을 벌였으나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적지 않은 압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3년 11월 13일 63세로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쇼가 태어났던 푸저우의 집은 공원으로 바뀌었고,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던 무덤은 중국 문화혁명 때 파헤쳐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훈장은 49년만인 2012년 광복절에 친손녀 마조리 허칭스(Majorie Hutchings)와 그녀의 딸인 외증손녀 레이첼 사씨(Rachel Sassi)에게 전달되었다.

안둥의 이륭양행 내에 임시정부의 안동교통지부 교통국을 설치해서 자금모집, 정보수집 보고, 지령 등의 전달, 무기 ・ 탄약 및 독립운동가의 운송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인적 ・ 물적 자원을 안전하게 운반하도록 도와주었다. 삼대에 걸쳐 일본인을 처가로 두었지만 일제의 체포 ・ 탄압 등에 굴하지 않고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인류의 자유와 정의, 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던 인물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英人「シヤウ」逮捕一件』 3책,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문서 #4. 1. 5. 12
  • ・ 原奎一郎 編, 『原敬日記』 5, 福村出版社, 2000
  • ・ 在上海日本領事館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東文社書店, 1946
  • ・ 「영국인 쇼우 사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9집, 1975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권, 1973
  • ・ 구대열, 「일제침략기 영국의 대한정책」, 『한영수교100년사』, 한국사연구협의회, 1983
  • ・ 이연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과 연통제」, 『한국사론』10, 국사편찬위원회, 1985
  • ・ 유진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국과 연통제연구」, 영남대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88
  • ・ 채영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의 설치와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논문집』 상, 국가보훈처, 1999
  • ・ 한철호, 「조지 엘 쇼(George L. Shaw)의 한국독립운동 지원활동과 그 의의-체포 ・ 석방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38, 2006
  • ・ 한철호, 「1930년대 일제의 조지 엘 쇼(George L. Shaw) 탄압 ・ 축출공작과 그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9, 2011
  • ・ 한철호, 「1920년대 전반 조지 엘 쇼(George L. Shaw)의 한국독립운동 지원활동과 그 의의-1920년 11월 석방 이후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3, 2012

한철호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독립기념관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조지 루이스 쇼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