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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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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텐민

다른 표기 언어 여천민 , 呂天民 동의어 텐민, 天民, 점동, 占東, 협소, 俠少, 욱초, 旭初, 금마, 金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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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년 5월 17일, 윈난(雲南) 쓰마오(思茅, 현 普洱)
사망 1940년 3월 4일
관련 사건 신해혁명
국적 중국
주요활동 1906년 중국동맹회 윈난지부장, 1911년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 윈난대표, 민국신문 총편집장, 1921년 광저우군정부 내정부 차장으로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약속, 1921년 중화전국각계연합회 윈난 대표, 1924년 대리원장, 1927년 국민당 윈난성 당무지도위원
포상훈격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중국동맹회, 중국국민당

1881년 5월 17일 윈난성(雲南省) 쓰마오(思茅, 현 普洱)에서 출생하였다. 원명은 점동(占東), 자는 텐민(天民)이다. 협소(俠少) ・ 욱초(旭初) ・ 금마(金馬) 등으로 별서(別署)하기도 하였다. 부친 여좌후(吕佐侯)는 농사를 주로 하면서도 경서에도 밝은 인물이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뤼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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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외삼촌 천시핑(陳西屛)이 훈장으로 있던 푸얼(普洱)의 홍원서원(宏遠書院)에 들어가 4년간 공부하였다. 1900년 10월 향시(鄕試)에 응시하기 위해 쿤밍(昆明)으로 올라갔으나 ‘의화단사변’으로 시험이 1년 연기되었다. 이에 시험을 거쳐 광서제(光緖帝)의 직접 비준에 따라 1891년 설립되었던 경정서원(經正書院) 우수반인 내과(內課)에서 공부하였다.

1901년 실시된 경자신축(庚子辛丑) 병과(倂科)에 합격하여 거인(擧人, 과거응시생)이 되었다. 1903년 회시(會試, 2차 시험)에 낙방하였으나 베이징(北京)을 오가는 길에 청조의 무능함과 인민생활의 어려움을 확인하고 우국우민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4년 10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고분학원(弘文學院) 속성사범반을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쑹자오런(宋敎仁)과 교류하며 중국유학생들의 집회에 참가하여 시사를 토론하고 신사상을 연구하며 황싱(黃興)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05년 7월 미야자키 도라조(宮崎寅藏) 등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일본 정치가의 소개로 유럽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도착한 쑨원(孫文)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7월 30일 동맹회주비회가 소집되자 윈난 출신 유학생 대표로 출석하여 입맹(入盟)을 선서하였다. 8월 20일 중국동맹회 성립대회에 출석 평의부(評議部) 평의(評議)에 선출되었다.

1906년 초 윈난 출신으로 동맹회에 가입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회 윈난지부(윈난분회라고도 칭함)를 창건하고 지부장에 추대되어 1908년까지 100여 명의 입당을 소개하거나 주맹(主盟)하였다. 1906년 4월 『운남(雲南)』 잡지 및 『전화보(滇話報)』를 창간 혁명을 선전하는 한편 동맹회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중요 필진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혁명 문장을 발표하였다.

1908년 4월 29일 쑨원이 영도한 제8차 기의가 윈난 허커우(河口)에서 폭발하자 혁명군을 성원하기 위해 양전홍(楊振鴻) 등 유학생들과 윈난독립대회를 발기하고 청조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할 동지 10여 명을 윈난에 진입시키기 위해 베트남(越南)으로 파견하였으나 5월 26일 기의가 실패하여 참전하지는 못하였다. 이 일로 청조에 의해 관비 유학생 자격이 박탈당하고 수배되었다. 이후 오모리체육학교(大森體育學校) 측과 협의하여 하계군사강습회를 열고 혁명 동지를 모아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909년 1월 일본을 출발하여 싱가포르에서 쑨원을 만나 임무를 부여받고 랑군(仰光)으로 가 혁명선전물 『광화보(光華報)』와 광화보가 개조 ・ 출판된 『진화보(進化報)』 주필로 활동하면서 각민서보사(覺民書報社) 설립을 주도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상하이(上海) 『민주보(民主報)』 주필을 맡았다. 1911년 4월 황화강기의(黃花岡起義)에 참가하여 통주부(統籌部)에서 인신(印信)과 문서의 보관 및 격문(檄文) 작성 등 업무를 담당하였다. 기의가 실패하자 상하이로 돌아가 『민립보(民立報)』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창지앙(長江) 유역의 혁명 활동 진행을 위해 1911년 7월 31일 쑹자오런 ・ 천치메이(陳其美) 등과 상하이에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성립하고 후보 간사를 맡았다. 1911년 10월 후베이(湖北) 혁명당원과 중국동맹회 중부총회의 요청으로 홍콩으로 가 반청기의(反淸起義) 영도를 위한 황싱의 우창(武昌)행을 청하였다. 예정보다 앞당겨 우창기의가 일어나자 황싱의 명으로 윈난에 들어갔다. 일본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리껀위앤(李根源), 일본 육사 출신으로 당시 윈난강무당 교관을 맡고 있던 탕지야오(唐繼堯) 등을 움직여 10월 31일 윈난 광복을 이끌어 냈다. 11월 1일 기의군이 대중화국윈난군도독부(大中華國雲南軍都督府)를 조직하자 참의에 임명되었다. 12월 난징(南京)에서 열린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에 윈난 대표로 출석하여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1912년 1월 1일 난징임시정부가 성립되어 1월 5일 사법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법부 총장 우팅팡(伍廷芳)은 상하이에서 남북화의를 진행하고 있었던 관계로 사법부의 모든 사무를 책임졌다. 임시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겨가자 3월 사법부 차장에서 물러나 동맹회 상하이기관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민국신문(民國新聞)』 총편집장을 겸하였다. 1912년 가을 남양(南洋) 각지와 버마 등지를 돌며 국민당 조직건설에 힘쓰는 한편 화교들의 본국 투자를 권고하였다.

1913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차혁명이 폭발하자 상하이에서 반(反) 위안스카이(袁世凱) 활동을 전개하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쑨원의 명을 받고 윈난으로 들어가 반 위안스카이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비밀리에 반 위안스카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호국군(護國軍)이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 사후 베이징으로 가 참의원 회의에 출석하였다.

1917년 7월 호법운동이 시작되자 광저우(廣州)로 남하하여 8월 25일 국회비상회의에 참가하였다. 9월 대원수부 참의에 임명되었다.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명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920년 8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부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승만 등 한국독립운동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던 장캉후(江亢虎)의 귀국을 기념하는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 초청받아 평소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동정을 보였음을 표시하는 연설을 행하고 지속적인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약속하였다. 1920년 11월 광저우에 군정부가 회복되자 남하하여 사법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장지(張繼) 등과 중국국민당본부 광저우판사처조직 업무를 담당하였다. 군정부가 취소되고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뒤인 1921년 5월 24일 내정부 차장에 임명되어 한동안 내정부장 대리를 맡기도 하였다. 1921년 1월 중화전국각계연합회(中華全國各界聯合會)에 윈난 대표로 출석하여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 독립이 성취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원조해야 한다는 의안을 제출하여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군정부 내정부 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21년 9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전사(專使) 신규식 일행을 접견하고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재천명하였다.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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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9월 6일 국민당 개진방략 기초위원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1923년 1월 2일 쑨원이 주재한 당무개진 회의에 출석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당강(黨綱) 및 총장(總章)을 최종 심의한 뒤 통과시켰다. 1923년 1월 23일 국민당본부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2월 2일 국민당본부에서 거행된 중앙간부회의 제1차 회의에 출석하였다. 1923년 7월 8일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당 중앙간부회의 제5차 회의에 출석하여 베이징 정변 후의 시국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하고 차오쿤(曹錕)과 연합하지 말것을 쑨원에게 건의하였다. 7월 10일 중앙간부회의 임시회의에 출석 역시 차오쿤과 연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8월 31일과 9월 3일 연달아 중앙간부회의에 출석하여 리위안훙(黎元洪)에게 총통 명의로 정부와 유사한 조직을 구성하게 하자는 일부의 의견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 무렵 쑨원이 추진하고 있던 소련과의 합작에는 찬성하였으나 중국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24년 4월 대법원장격에 해당하는 대리원장(大理院長)에 임명되어 사법행정 사무를 더불어 관할하였다. 같은해 재차 국민당 본부 참의에 임명되고 광저우 제3구당부집행위원을 겸하였다. 1927년 국민당 윈난성 당무지도위원에 임명되고 동시에 국민정부에 의해 윈난성정부위원 겸 건설청장에 임명되었으나 정식으로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8년 11월 7일 훈정시기 제1기 입법위원에 임명되어 사망시까지 4차례 연임하였다. 1929년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에 윈난 대표로 출석하였다.

1930년 2월 국민당 당사사료편찬위원회가 신설되자 명예 편찬(編纂)에 지명되었다.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윈난으로 내려가 동원위원회 설계위원을 맡았다. 1940년 3월 4일 쿤밍에서 병사하였다. 저작으로는 『중국국민당사고(中國國民黨史稿)』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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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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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羅家倫 主編, 『革命文獻』 第七輯, 臺北, 黨史會,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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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郭廷以, 『中華民國史事日誌』, 臺北, 近代史硏究所, 1985.
  • ・ 羅家倫 ・ 黃季陸 主編, 『國父年譜』, 臺北, 黨史會, 1994.
  • ・ 中國國民黨黨史委員會, 『中國國民黨職名錄』, 臺北, 黨史會, 1994.
  • ・ 中國國民黨黨史委員會, 『中國國民黨一百年大事年表』, 臺北, 黨史會, 1994.

김영신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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