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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유인석

다른 표기 언어 柳麟錫 동의어 여성, 汝聖, 의암, 毅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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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2년 1월 27일, 강원 춘천(春川)
사망 1915년 1월 29일
관련 사건 을미의병, 경술국치
본관 고흥(高興)
주요활동 1896년 제천의병장, 1909년 십삼도의군 도총재, 1910년 성명회 결성, 성명회 선언서 발표, 병탄 반대 투쟁
포상훈격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제천의병, 화서학파, 십삼도의군, 성명회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申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다.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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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때 먼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저명한 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입양되던 그 해에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당시 이항로 문하에는 임규직(任圭直), 이인구(李寅龜), 이준(李峻), 김평묵(金平黙), 유중교(柳重敎) 등 재사(才士)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교학 분위기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동안 화서학파 학문의 핵심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위정척사, 존화양이 정신을 철저히 몸으로 체득하였다.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숭명존화(崇明尊華)의 상징이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을 때 이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듬해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며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1868년 이항로가 서거하자 이항로의 적통을 계승한 김평묵과 유중교를 연이어 스승으로 섬겼다.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규각주1) 』가 체결됨으로써 일제는 대조선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조선과 일본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46명의 화서학파 동문들과 연명으로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었지만, 이 상소는 그와 화서학파 유림들이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 속성과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병자수호조규 체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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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고향인 춘천 가정리를 떠나 충북 제천의 장담리(長潭里)로 이주했다. 이항로의 문인이자 대학자였던 유중교가 1888년 이곳으로 내려와 문인들을 양성하던 중 그해에 작고했기 때문에 그 기반을 이어받기 위한 것이었다. 스승이자 재당숙이던 유중교는 1891년 김평묵 사후에 김평묵의 적전(嫡傳)을 계승하여 화서학파의 제3대 수장(首長)이 된 인물이다.

장담리 이사 후 유중교의 학문적 기반을 승계함으로써 이항로-김평묵-유중교로 이어지는 적전학통을 계승하여 화서학파 제4대 수장으로서의 지위와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중교의 학당이었던 자양서사(紫陽書社)의 강장(講長)이 되었고, 그 동안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서상렬, 정화용, 안승우, 박정수, 원용정, 이춘영 등을 자신의 문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유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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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군사적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조선의 행정, 제도 등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함으로써 군사적, 정치적 양면에 걸쳐 전방위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불리는 이때의 여러 변혁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변경한 변복령(變服令), 이른바 의제개혁은 전통 수구유생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와 극단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을미회복시입언(乙未毁服時立言)』이란 글을 지어 “(전통) 의복을 바꾸는 것은 천지, 성현, 선왕, 부조(父祖)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하여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변복령이 내려진 직후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이러한 ‘변란’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이틀간 원근의 문인사우 수백 명을 모아 대규모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 등 유림 집회를 거행하였다. 한말,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 시기에 전통 선비들의 처신의 규범이 되기도 한 ‘처변삼사(處變三事)’는 이 집회에서 논의된 결과였다. 

처변삼사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대의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의리를 간직한 채 치명(致命)하는 ‘자정수지(自靖遂志)’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이 세 가지 행동 방안은 향후 그가 항일운동을 전개해가는 데 준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 수구파 지식인, 선비들의 기본적인 처신 방안을 제시한 기준점이 되었다.

을미사변에 대한 상소문(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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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변복령 이후 일제는 한국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10월 8일에 일으켰다. 이어 1896년 1월 1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꾸고 동시에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였다. 이와 같이 변복령,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충격적, 침략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한 직접적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1896년 1월 의병을 일으켜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지평, 원주 일원에 거주하던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勝宇) 등 그의 문인들이 1896년 1월 김백선(金百善)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충청도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제천의병의 발단이었다.

이들은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徐相烈)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직후에 관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영월에 모인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따라,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신체를 보존한다는 의미의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의병 봉기의 명분을 천명하고 전 국민이 의병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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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을 근거지로 삼고 의병에 참여한 뒤 1896년 2월 16일 충청도의 요지인 충주로 진출하였다. 충주에서는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개화정책을 추종하는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포고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포하였다. 또한 의병의 전력을 확충하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이범직 등을 영남 및 호서 각지로 소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이때 영남으로 남하한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영천 등지의 의병과 연합하여 상주 태봉(台峰)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고, 호서지방으로 파견된 이범직은 단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관군의 압박을 심하게 받게 되자 3월 4일 충주를 포기한 채 근거지 제천으로 회군하였다. 제천으로 회군한 뒤에는 주변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李康秊)을 비롯하여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直), 횡성의 이명로(李明魯) 등이 각기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합류해 왔다. 이후 3개월간 제천의병은 수안보, 음성, 단양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대소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그 뒤 제천의병이 근거지 제천성을 상실한 것은 5월에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의 공격 때문이었다. 의진 해산을 종용하던 장기렴의 관군은 5월 26일 제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관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들은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從士官)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하는 등 역전 분투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결국 제천성을 내주고 말았다.

    • 1~2충주성 터(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와 당시 파괴된 충주성문

최후의 거점 제천성을 상실한 뒤, 관군의 압박을 피해 황해도와 평안도 등 서북지방을 향해 북상하였다. 6월 10일 원주 강천(康川)에서 서북행의 장도에 오른 뒤 영월, 평창, 강릉을 지나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하여 양덕, 맹산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도 관찰사, 군수가 의병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재기항쟁을 도모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중국 서간도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북상을 계속한 끝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한번 친일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남긴 채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아이성(阿夷城)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1차 서간도 망명으로 국외 망명활동의 시작이었다.

「재격백관문미부再檄百官文尾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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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국 서간도에 들어간 직후에 회인현(懷仁縣, 현 桓仁縣)의 현재(縣宰)인 서본우(徐本愚)의 제지를 받아 8월 29일 혼강(渾江, 일명 파저강) 강변의 사첨자(沙尖子)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240명의 휘하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으로 귀국하고 원용정, 유홍석 등 21명은 서간도에 잔류하였다. 이후 수의(守義)와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 등 장기지속적인 형태로 항일투쟁의 방향을 전환시켜 갔다.

의병 해산 이후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들어가 수의하며 재기항전을 위한 근거지를 구축하려 하였다. 이어 1897년 같은 해 3월(음력)에는 오도구를 떠나 같은 해 5월(음력) 회인현 호로두(葫蘆頭)로 이주해 일시 정착하였다. 1897년 8월(음력)에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귀국길에 올라 압록강을 건너 초산에서 고종에게 두번째 상소를 올려 거의(擧義) 이후 자신의 행적을 밝히며 그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관리로 지목되어 처단된 단양군수 권숙의 아들이 복수를 위해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1898년 윤 3월 통화현 오도구로 2차 망명한 그는 이후 그해 10월(음력) 다시 통화현 팔왕동(八王洞, 현 패왕조)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인해 평북 강계로 내려올 때까지 약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주로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수십명의 동문지사들도 그를 따라 수의와 항일투쟁을 모색하여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에 이들과 함께 ‘때가 회복되기를 기다려서(以待來復) 고통을 참고 원한을 품는다(忍痛含寃)’라는 요지의 『의체(義諦)』를 약정하면서 항일투쟁의 의지를 더욱 다져갔다.

1900년 7월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중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자 재차 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수년간 황해도와 평안도 각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주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평산의 산두재(山斗齋)를 비롯하여 은율의 흥도서사(興道書社), 개천의 숭화재(崇華齋), 용천의 옥산재(玉山齋) 등은 이 시기 양서지방의 활동 거점이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철산, 안주, 선천, 평양, 용강, 서흥, 해주 등 양서지방 도처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강학을 통해 제자들을 기르고, 또 향음례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 존화양이에 입각한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와 같은 강학 노력으로, 양서지방 유림계의 항일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수백 명에 이르는 문인을 양성할 수 있었다. 

서북지방 문인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이진룡(李鎭龍), 김기한(金起漢), 조맹선(趙孟善), 우병렬(禹炳烈), 김화식(金華植), 백삼규(白三圭), 박치익(朴治翼) 등이 있는데, 이들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항일투쟁 세력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일제의 대한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1907년 헤이그밀사의거를 계기로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등이 연속되면서 국망을 향한 긴박한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망명은 이런 시대적 배경 하에서 결행되었다.

1908년 봄 무렵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2년간에 걸쳐 국내외 각지에 분산된 무장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연해주 남단의 두만강에 근접한 크라스키노로 이주한 직후인 1908년 10월(음력)에 ‘이범윤의 항일전을 후원하기 위해’ 방대한 『의병규칙(義兵規則)』을 제정하였다. 의병의 명분에서부터 군무 ・ 기율 ・ 편제 등 항일전 수행에 절급히 요구되는 제반 항목을 35개 조목으로 나누어 상세히 규정한 이 규칙은 그가 연해주에서 국내외 의병세력 통합을 구상하면서 발표한 최초의 문건이었다.

1909년 전반기에는 국내외 각지의 여러 의병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일종의 의병 결사체인 ‘관일약(貫一約)’과 의병 서명록인 ‘입의안(立義案)’ 두 가지를 병행하였다. 관일약은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항일 무장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전통 향약(鄕約) 조직의 성격을 띤 결사로, 연해주에서 의병세력 통합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견지한 성리학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의병 전위조직이었다. 또 관일약과 함께 의병 통합을 위한 전위조직의 형태로 시행한 것이 입의안이었다. 

일정한 양식을 갖춘 의병 동맹록이었기 때문에 입의안은 일명 동의안(同義案)이라고도 불렀다. 항일의병세력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결성된 관일약과 입의안 양자는 각기 별도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유기적 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입의안은 국권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항일전을 표방하는 것이며, 관일약은 일제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이 성리학적 가치관과 질서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기능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국내외 의병 등 항일 무장세력 통합 노력은 1910년 6월 21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편성으로 구현되었다. 통합군단 구상은 1908년 하반기에 작성한 『의병규칙』에서 비롯되었으며, 1909년 관일약 시행과 입의안 작성으로 더욱 구체화되었고, 1910년 초 통합군단 시행 세목으로 작성된 『의무유통(義務有統)』에 이르러 제반 준비를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군단을 표방하고 편성된 심삼도의군의 중앙 본부에는 도총소(都總所)를 두었는데, 그 총책은 총단위(總壇位)와 도총재(都總裁)로 양립되었다. 그 가운데 총단위를 연해주 의병의 지도자인 이범윤(李範允)이 맡았던 데 비해, 자신은 도총재가 되어 통합군단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그 아래에 도총령(都總領) ・ 도참모(都參謀) 등 부서를 최고 지휘부에 배치하고, 다시 그 휘하에 각도, 각읍에 총재, 총령 이하 여러 임원을 두었다. 

십삼도의군의 실질적인 군사력은 이범윤이 거느리는 창의군(彰義軍)과 이남기(李南基)가 거느린 장의군(壯義軍) 두 군단으로 편제되었는데, 이 두 군단을 도총재가 지휘하는 구조였다. 이때 주어진 십삼도의군 도총재라는 지위는 을미의병에 투신한 이래 그때까지 일관되게 항일투쟁을 견지한 데 대한 상징적 직함이기도 하다. 십삼도의군이 편성된 장소 ‘재구(梓溝)’는 ‘재피거우’의 음역으로 현재 위치는 바라바시(구 몽고과가이) 부근의 마루문카강 분지에 있는 말루지노(재피거우) 마을 자리로 비정되고 있다.

십삼도의군은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 6월에 편성된 뒤 불과 두 달 뒤인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삼도의군을 편성한 목적이 대규모 무장항일전을 통한 국권회복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항일전을 이를 결행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7월에 이상설(李相卨)과 연명으로 퇴위당해 있던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십삼도의군이 항일 전면전을 구상하고 있음을 밝히고,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영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고종의 파천 요청은 국내외의 정세나 고종의 성품으로 미루어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였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심삼도의군의 원대한 계획과 구상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십삼도의군은 전면적 항일전 계획을 바꾸어 거족적 형태의 병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8월 22일 병탄조약이 맺어졌다는 비보를 듣고, 국망을 저지하기 위해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였다. 성명회라는 회명은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 1~2「성명회 선언서」

성명회의 ‘총대(總代)’에 추대되었고, 당일로 성명회 취지서를 발표하여 국권을 침탈의 일제의 죄행을 규탄하고 조국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그들과 투쟁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나아가 병탄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주요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한인 서명을 받았다. 그의 성명이 서두에 오른 이 서명록은, 열강에게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그 지지와 후원을 요청하는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첨부되어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각국 정부에 공식문서로 발송되었다.

성명회 활동 이후에는 노구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1914년 중국으로 이거할 때까지 유정구각주2) , 운현각주3) , 목화촌각주4)  등 우수리스크(소왕령) 외곽지대에 거주하면서 국권회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독립운동 근거지 구축에 마지막까지 전력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도 1912년에는 중화론적 화이관에 입각하여 동서양의 문물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유명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914년 3월에는 연해주를 떠나 중간 기착지인 중국 봉천성 서풍현(西豊縣)에 도착하였다. 연해주에서 중동선을 따라 열차를 타고 만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풍을 경유한 뒤 제함(濟咸), 제춘(濟春) 두 아들과 친척사우들이 모여 있던 서간도 흥경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로 다시 내려갔다. 이것이 제3차 서간도 망명이었고, 최후의 귀착지였다. 

난천자는 다음해 작고한 뒤 유해를 임시 안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해 8월 최후의 고종지(考終地)가 된 관전현 방취구(芳翠溝)로 들어가 수의하였다. 이곳은 1896년 의병을 해산했던 사첨자의 혼강 부근으로, 최초의 망명 수의처(守義處)로 회귀한 것이었다. 방취구에서 이곳에서 1915년 3월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자양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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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징현 난천자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서거 20년이 지난 1935년 춘천 가정리로 반장되어 묘역이 조성되었다. 문인 이소응에 의해 1907년에 건립된 제천 장담리의 자양영당(紫陽影堂)에 사후 영정이 모셔졌다. 평북 영변의 약산(藥山) 제1봉 정상에 문인지사들에 의해 추모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묘소가 있는 춘천 가정리는 2005년 의병마을로 조성되었고, 자양영당이 있는 장담리는 2001년 제천의병전시관이 건립되었다. 

중국 서간도 망명지의 방취구에는 1994년 관뎬현에서 건립한 유적지 기념비인 ‘의암기비(毅菴記碑)’가 있고, 난천자의 구 묘지(墓址)에는 2003년 ‘의암선생기념원(毅菴先生紀念園)’이라는 기념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 1~2『소의신편昭義新編』

1899년 문인 김화식 등에 의해 그동안 나온 항일의병 관련 글을 모아 그의 문인사우들의 글과 함께 『소의신편(昭義新編)』이 간행되었고, 1902년에는 역시 같은 문인인 백삼규, 김형걸 등에 의해 『소의속편(昭義續編)』이 발간되었다. 사후에는 그의 시문을 모은 문집 『의암집(毅菴集)』이 발간되었고, 2010년에는 제천문화원에서 『국역 의암집』을 출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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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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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의병전쟁연구(상)』, 지식산업사, 1990
  • ・ 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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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영섭, 『유림의병의 선도자 유인석』, 역사공간, 2008
  • ・ 박민영, 『유인석의 국외 항일투쟁 노정(1896-1915)-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 ・ 박민영, 『유인석의 의병통합 노력과 안중근의 하일빈의거』, 『의암학연구』 7, 의암학회, 2009 
  • ・ 박민영, 『연해주 망명시기 유인석의 의병세력 통합운동』, 『의암학연구』 11, 의암학회, 2013.

홍영기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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