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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김병조

다른 표기 언어 金秉祚 동의어 윤석, 允錫, 일재, 一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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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定州)
사망 1948년 2월 25일
본관 김녕(金寧)
주요활동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사료편찬회 위원, 대한적십자사 상의원, 1921년 한중호조사 회원, 1945년 조선민주당 창당
포상훈격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

1877년 1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동주면(東州面) 봉명동(鳳鳴洞)에서 부친 김경복(金京福)의 3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자는 윤석(允錫), 호는 일재(一齋)이다. 6세 때부터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20세가 되던 해에 구성군(龜城郡) 관서면(館西面) 조악동에 서당을 열었다.

김병조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03년 구성군 방현면(方峴面)의 삼희재서당을 인수하여 신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로 개선했다가 1908년 기독교 학교로 개편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희명학교 한문교사로 있던 1909년 6월 22일, 구성군 방현면 남시에서 열린 학생운동회에서 교육에 관한 연설을 하던 중 임석한 일본 순사가 “우승열패 약육강식 현하(現下)의 대한국(大韓國)” 운운한 부분이 불온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며 연설을 중단시킨 일도 있었다.

1913년 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6월 졸업하고 그해 8월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로 활동하였다. 신학교에 다닐 때 함께 수학한 이승훈(李昇薰), 송병조(宋秉祚), 김인전(金仁全), 장덕로(張德櫓), 김승만(金承萬) 등과 맺은 친분이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1919년 2월 중순, 선천에서 열린 의산노회(義山老會)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한 뒤 유여대(劉如大), 장덕로, 김승만과 함께 그곳 목사 양전백(梁甸伯)의 집에 들렀다가 3・1운동의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에게 3・1운동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에 참여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모든 일을 그에게 일임하였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이전 모임에서 약속한대로 평북지역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만세 시위에 참여를 독려하는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만들어 각지에 살포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이를 피해 장덕로, 이원익(李元益), 조상섭(趙尙燮), 김구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단둥(安東)을 거쳐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였다.

    • 1양전백
    • 2이승훈

상하이에 온 후 4월 22일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7일 개회된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법제위원회 이사로, 8월 18일에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 수립 초기의 법제 정비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향한 외교 선전 활동에 집중하였다. 5월 23일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의 활동을 지원하려고 목사 손정도(孫貞道), 장로 장붕(張鵬) 등과 함께 10명이 연서한 「한국시사진술서(韓國時事陳述書)」를 발표하고 국제연맹과 만국장로교연합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진술서는 일제 강점 이후 한국 교회의 핍박상을 폭로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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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이 결성되자 향후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또한 당시 일제는 강제 병합 이후 한국 침략과 지배를 개혁과 진보로 합리화시키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3・1운동을 악의적으로 조작 날조한 여러 영문판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하여 이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일제의 침략과 잔학상, 일제가 은폐한 독립운동 등 한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7월 7일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국제연맹에 제출할 사료집을 편찬하기로 하고, 11일 회의에서 국제연맹회제출안건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때 오의선(吳義善), 최창식(崔昌植), 정인과(鄭仁果), 이춘숙(李春塾)과 함께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사료집 편찬을 담당할 기구로 임시사료편찬회가 구성되었다.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였던 안창호(安昌鎬)가 총재를 맡았고, 8명의 위원과 22명의 조역으로 구성되었는데, 8명의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위원(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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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위원회가 국제연맹회에 제출할 사료집 기초안을 완성하자 9월 8일 의회에서는 이 안건을 심의 수정할 국제연맹회제출안건심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고일청(高一淸), 유경환(柳璟煥), 장붕 등과 함께 위원에 선출되어 안건 수정작업에 착수하여 9월 23일 사료집 전 4권의 편찬과 인쇄를 완료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에서 편집한 『한일관계사료집』(총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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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사료편찬회 주임 이광수(李光秀)가 “고대로부터 합병에 이르는 한일 관계 사료들 다수 모집하기는 김두봉 씨며, 재료를 구하기 가장 곤란한 독립운동 사실을 모집하기 낮밤으로 쉬지 않음은 33인 중 김병조 씨와 이원식 양 목사라”라고 했듯이 사료집 편찬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사료집 편찬이 완성된 뒤 임시사료편찬회는 해산됐으나 임시정부의 사료 조사와 편찬사업은 계속되어 이원익과 함께 국무원 사료입사사무(史料立査事務) 촉탁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20년 6월에는 임시사료편찬회에서 수집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 발간하였다. 1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1920년까지 일제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19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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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임시정부 외곽 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온 후 상하이한인기독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에 종사하면서 1919년 7월 독립군의 의료기관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조직되자 상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23일 대한적십자회는 병원 설립과 간호사 양성을 위해 기왕의 회원을 31대(隊), 자유대, 독립대, 십자대 등 4개 대로 나누어 경쟁적으로 회원 모집에 나섰다. 이때 자유대 대장이 되어 대원들과 함께 회원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서 약 한달 뒤인 12월 21일 열린 제1회 대한적십자회 회원 대모집 경쟁회에서 1등을 하였고, 개인 성적도 3등을 하여 은상을 받는 등 대한적십자회의 발전에 힘썼다. 12월 22일 상하이 한인의 교민 단체인 대한거류민단 의사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1920년 2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만들기 위한 주식 모집 발기위원회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사 양성 기념 사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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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25일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직을 사면 청원하여 물러났다. 이 무렵 안창호가 국내외에 있는 국민에 대한 선전 사무를 집행하는 비밀기관으로 조직한 지방선전부에 들어가 이사로 활동하였다. 4월 14일 신민회 활동으로 옥고를 겪고 간도로 건너갔다가 상하이로 와서 안타깝게 병사한 안태국(安泰國)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손정도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 교회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해 9월에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한국 측 회원으로 참가하여 반일 한중 협력에 노력하였다. 1922년 8월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사에 임명되어, 상하이 삼일예배당에서 인성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소녀 하기(夏期)연극단을 조직하여 인성학교 유지비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시의정원 의원을 물러난 뒤에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적 단결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1921년에 들어 임시정부가 내분과 일제 탄압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안팎에서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2월 박은식(朴殷植) ・ 원세훈(元世勳) ・ 왕삼덕(王三德) 등 14인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하여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 강고한 정부 조직과 독립운동의 최량 방침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론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5월 12일과 19일 두 차례 국민대표회 소집을 위한 연설회를 주관하였다. 5월 19일 연설회에서 국민대표회기성회가 조직되면서 기성회 조직위원 20인 가운데 한 명으로 당선되었다. 국민대표회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가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처음 기대와 달리 임시정부 문제를 두고 임시정부 옹호파,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분열되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던 5월, 펑톈성(奉天省) 지안현(輯安縣) 패왕조(覇旺朝)교회의 초빙을 받아 홀연히 상하이를 떠나 서간도로 갔다.

서간도에서 패왕조교회와 화전자(樺甸子)교회를 담임하며 목회 활동에 노력하면서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간행하고, 1926년에는 남만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에는 지린성(吉林省) 무링현(穆陵縣)에 신일소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노력하는 한편, 『한족신문』을 발행하는 등 교육과 목회에 힘써 1932년 북만노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이 성립되어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33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평북 용천군 양서면 동상(東上)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경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목회와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고향인 정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1946년 반공의거를 위한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여 반공운동을 벌이던 중 1946년 12월 24일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1948년에 사망하였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50년 2월 20일 즈음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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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李炫熙, 「一齋 金秉祚와 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0

윤대원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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