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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반드시 뜻이 있고 뜻은 반드시 길상이다
2013년 3월 경주에서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경주민화포럼이 열렸다. 토론회에서 일본 도시샤 대학의 기시 후미카즈(岸文和) 교수는 민화를 ‘행복화(幸福畫)’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몇몇 소장학자 사이에서 행복화란 말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한 발표자는 신문에 「행복화라고 부릅시다」라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행복화 덕분에 행복했던 포럼이었다. 이에 앞서 2007년 필자는 부산박물관에서 개최한 민화전에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라는 제목으로 자문을 한 바 있다. 민화에 깃들어 있는 상징코드는 ‘행복’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다양한 이미지가 민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상징세계는 민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청나라 시기에 전하는 말로 “그림에는 반드시 뜻이 있고, 뜻은 반드시 길상이다(圖必有意, 有必吉祥)”라는 것이 있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모두 상징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그것은 행복을 빌고 출세를 염원하며 장수를 소망하는 복록수(福祿壽)의 길상(吉祥)이다. 길상의 원뜻에는 기복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윤리적 덕목도 포함되어 있다. 후한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길(吉)은 선(善)이고 상(祥)은 복(福)이라 했다. 착하고 복되게 사는 것을 길상이라 여겼다.
길상의 의미에는 윤리적인 선과 기복적인 복이 복합되어 있다. 당나라 때 성현영(成玄英, 601~690)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길상지지(吉祥止止)에 대해서 “길이란 행복하고 선한(福善) 일이며, 상이란 아름답고 기쁜(嘉慶) 일의 징후다”라고 소(疏)를 달았다. 행복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기쁜 일이 길상이란 뜻이다. 길상을 통한 행복은 기복과 윤리 양면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민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더불어 행복을 염원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출세를 꿈꾼다. 아름다운 이미지임과 동시에 기복의 상징체다. 복잡한 이미지로 구성된 조선 민화와 인상파 회화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무명 화가가 그린 「책거리」다. 책갑들 주위로 두루마리, 주전자, 바구니, 술병, 필통, 향로, 모란꽃, 작약, 연꽃, 오이, 참외, 수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서안과 연상의 가구로 복잡하게 놓여 있는 기물과 식물들을 정리하려고 하나 역부족이고, 가야금이 이들 사이로 비녀처럼 질러져 있어 복잡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저마다 한껏 목소리를 내는 이들 기물과 식물은 개성을 살리며 어울림을 꾀하는 재즈풍의 합창을 연상케 한다.
두 번째는 복잡하다기보다는 어지럽혀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작품이 있다. 위의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이 그린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다. 식탁 위에 과일바구니, 항아리, 주전자, 과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게다가 구겨지고 더렵혀진 하얀 식탁보가 이들을 쓸고 떨어질 태세다. 세잔은 일상과 평범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서민의 식당을 배경으로 택했고 그것도 사소한 과일과 기물을 소재로 등장시켰다. 아울러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세련됨보다는 질박함을, 시각적 사실성보다는 촉각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세잔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소하고 평범한 소재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두 그림 모두 흐트러짐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점이 공통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민화 책거리는 세잔의 정물화와 달리 단순한 장식이나 이미지 표현에 머물지 않았다. 그림 속의 기물과 식물들은 각기 의미하는 상징들이 있다. 책과 문방구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작약과 모란은 행복을 추구하며, 오이와 참외는 씨가 많기 때문에 다산, 그중에서 다남(多男)을 염원하고, 수석은 장수를 기원한다. 이 그림은 사내아이를 많이 낳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출세하여 행복을 누리며 장수하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민화는 서양화의 이미지와 달리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특색을 보였다. 이미지를 통해서 상징적인 의미를 은유했고, 상징성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꿈꿨다. 과연 민화에 나타난 행복의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 유형별로 살펴보자.
불교와 유교를 넘나들었던 모란, 연꽃과 함께 그려진 새와 물고기
민화 속에 펼쳐진 행복의 조건은 ‘가정의 평안’이다. 화조화에조차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 보이고 화목한 가정이 펼쳐져 있다. 많은 학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할 때 행복지수가 높아진다고 보았는데,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정이 무엇보다 우선순위다. 이는 가족을 중심으로 생활이 이뤄진 전통사회의 특색을 보여준다.
새 가운데 금슬이 가장 좋은 새는 원앙이다. 물새인 원앙은 암컷과 수컷이 결코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한 마리를 잡아간다면, 남은 한 마리는 제 짝을 그리다가 죽고 만다. 그래서 원앙을 필조(匹鳥), 즉 배필 새라 한다. 쌍으로 그려진 새들은 음양의 조화이자 부부 화합을 상징한다. 또한 백두조는 할미새의 종류로 머리가 검지만 눈썹 뒤는 희다. 이 때문에 주례사의 단골 문구로 등장하는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도록 해로하라는 축원의 의미가 새 형상에 담겨 있다.
단란한 가정의 상징은 상상의 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봉황은 상상의 새이지만 구추도(九雛圖)라 하여 암수 봉황이 아홉 마리 새끼와 단란하게 그려지고, 기린이나 해태도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 이들 화조도 병풍은 주로 안방의 부인들을 위해 제작되는데, 그것은 이들 그림이 가정의 행복과 화합을 기원하기 때문이다.
가족 개념은 민화뿐만 아니라 궁중 회화 및 문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민화에서는 가족관계가 고상하게 그려질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도 해학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다른 유의 그림과 차이가 난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화조도」는 궁중 장식화다. 치밀하고 세련된 묘사와 고급스러운 채색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한쪽 면에 기대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의 바위와 그 위에 부드럽게 휘어진 나뭇가지 사이에 날카롭게 사선 방향으로 곧게 뻗은 공작의 꼬리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새들은 모두 쌍을 이루고 있다. 부부 화합을 상징한 것이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의 민화 「화조도」에서도 새들이 짝지어 노닐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궁중 회화와 차이점이 드러난다. 새들이 벌레와 물고기 등의 먹이를 두고 서로 나눠 먹는 모습을 볼 때 한편으로 매우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흥부네 가족처럼 치열한 모습도 엿보인다. 의외의 장면에 해학적인 요소를 더한 발상은 서민 화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이미지의 변형과 해학적인 친근감은 민화다운 맛을 풍부하게 한다.
행복의 꽃이라면 단연 모란을 꼽을 수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형에 부귀를 상징한 까닭에 모란은 다른 꽃보다 더 큰 각광을 받았다.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것이다”라고 읊었다. 모란 이미지의 쓰임은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았고, 사찰에서도 연꽃 못지않게 많이 쓰인 이미지였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모란문으로 치장되었다.
특히 혼인, 회갑연, 회혼례 등 잔치 때에는 모란병풍이 필수적이라 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궁중에서는 가례, 길례, 흉례 등 행사에 모란병풍을 많이 쳤고, 여유가 없는 사대부는 잔치 때 제용감(濟用監)이란 관청에서 모란대병을 빌려 쓰기도 했다. 경기도 화성지역 성주굿의 사설은 “모란병풍에 인물병풍 화초병풍을 얼기설기 쌍으로 쳐놓고”로 시작된다. 모란병풍을 앞세운 것은 다른 병풍보다 사용 빈도가 높았음을 시사한다.
모란도와 더불어 인기를 끈 꽃그림은 연화도다. 연꽃은 그 의미가 풍부하고 상징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연꽃 하면 불교의 전용적인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건축이나 예술품의 무늬로 쓰였다. 이때 연꽃은 하늘을 상징하게 된다. 연꽃 문양이 천장 중앙에 그려진 것도 그러한 의미로 파악된다. 불교에서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도 청결한 꽃을 피우는 속성에 비유해 더러운 속세에서 맑은 진리를 피어내는 정결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초창기 불교미술에서는 연꽃을 통해서 보살, 천인 등과 같은 이상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의미로 많이 활용되었다. 장천1호분, 오회분4호묘, 오회분5호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연꽃도 연화화생의 의미였다. 그런데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유교에서 연꽃은 주돈이가 언명했듯이 군자를 상징한다.
민화 속의 연꽃은 불교나 유교의 상징과 달리 여러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연꽃이 어떠한 소재와 짝을 짓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변화한다. 물총새가 연밥을 쪼면 다산이나 출세를 기원한다. 연밥에 촘촘히 박힌 씨들은 귀한 아들을 빨리 낳기를 기원하는 ‘인하득우(因何得耦)’를 의미하고, 그 씨를 쪼는 행위는 출세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연꽃과 물고기가 그려지면 해마다 넉넉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기원하는 ‘연년유여(連年有餘)’를 뜻한다. 연꽃의 연(蓮)은 잇따를 연(連) 자와, 물고기의 어(魚) 자는 여유로울 여(餘) 자와 중국 발음이 같아 서로 바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연꽃과 물고기는 우의(寓意)적으로 매년 풍요롭기를 바라는 의미가 된다. 제비가 연꽃 위를 나는 그림은 천하가 태평하여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축원하는 ‘하청해안(河淸海晏)’의 의미다. 때문에 여러 형식의 연꽃 그림을 한 병풍에 모두 담아 방에 친다면, 거주자는 “행복의 연못” 속에서 사는 셈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연화도가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조형적 표현 또한 다채로웠다.
백 명의 아이를 그린 까닭, 포도와 오이와 가지가 상징하는 것
대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매우 간절한 소망 중 하나였다. 특히 사내아이로 대를 잇는 것은 소망을 넘어 간절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다. 『동국세시기』에 기록된 충청도 진천의 풍속에 대한 짧은 언급에서도 절박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여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우담(牛潭)에 있는 동서(東西) 용왕당(龍王堂), 삼신당(三神堂)으로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그 행렬이 끊이지 않고 사방의 여인들이 모두 와서 기도하여 시장판처럼 1년 내내 들끓었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일 때에도 혈족 가운데서 찾았다.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았다. 용하다는 산신, 용왕신, 삼신, 칠성신, 미륵부처에게 빌고, 남녀의 성기 모양을 한 돌이나 나무에 비벼대며, 몸속에 부적이나 은장도를 지니고, 심지어 수탉의 생식기까지 날것으로 먹었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산력을 중요시하며 가부장적인 권위가 지배한 전통사회에서는 사내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소망이 단연 우위를 차지했다.
다남의 소망을 담은 고사인물화로는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와 「백동자도(百童子圖)」가 대표적이다. 「곽분양행락도」는 당나라 때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해진 명장 곽자의(郭子儀, 697~781)가 자손과 신하들에 둘러싸여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곽자의는 복장(福將), 복성(福星)으로 불릴 만큼 만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곽분양행락도」는 궁중의 가례(嘉禮) 때 이를 축하하는 그림으로 제작되었고, 민간에서는 혼례 장식화로 쓰이곤 했다.
「백동자도」는 많은 어린이가 놀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원래 이 그림은 지혜롭고 재주와 학식이 많은 백 명의 아들을 둔 주(周) 문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조선에서는 궁중에서 「곽분양백자도」라는 제목의 그림이 존재했듯이 곽자의가 백자천손을 거느린 팔자 좋은 사람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동자들의 놀이가 초기에는 목마, 연놀이, 연꽃놀이 등 중국의 놀이에서 점차 닭싸움, 술래잡기, 소꿉장난, 미역 감기, 재주넘기 등 조선의 놀이로 바뀐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백자도」는 더 이상 중국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훈련각(訓鍊閣)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는 우리 관아 건물에 우리 복식을 한 어린아이들이 벼슬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어사화를 쓰고 목마 탄 미래의 과거급제자 일행이 악대의 음악에 맞춰 행진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평생도의 과거급제 장면이고, 훈련각에 앉아 병사들을 호령하는 것은 무관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다. 이 그림은 더 이상 주나라 문왕을 운운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한국화되었다. 이처럼 고사인물화는 대부분 중국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았지만 민화가들은 우리 이야기인 양 친숙한 모습으로 각색하는 데 능했다.
그림 속에 깃든 다남의 소망은 매우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씨가 많거나, 넝쿨이 이어지거나, 남근을 연상케 하는 과일이나 채소는 영락없이 다산의 상징이다. 포도, 수박, 석류, 불수감, 연밥 등 씨가 많은 과일이나 채소는 씨 하나하나가 사내아이를 상징한다. 포도, 오이, 참외 등 넝쿨이 있는 것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오이나 가지같이 남근을 연상케 하는 채소는 남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직설적인 표현이다.
이들 상징 가운데 비교적 오랫동안 각광을 받은 소재는 포도다. 포도는 넝쿨식물로서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그 열매는 자손이고 그 넝쿨은 자손의 번창을 의미했다. 우리나라에 포도가 전해진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포도가 미술의 문양으로 사용된 것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에서부터 나타난다. 암막새의 드림새에 아름다운 곡선의 넝쿨과 싱그러운 포도 알갱이들이 어우러진 문양이 새겨졌다. 고려시대에도 포도는 문양으로 애용되었다. 포도문동경, 청자상감포도문병 나전칠기포도문함 등 여러 공예품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포도문과 더불어 포도도(葡萄圖)도 즐겨 그려진다.
특히 16, 17세기에는 황집중, 이계호 등 포도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까지 등장했다.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프리어 갤러리의 「포도도병」은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로 동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포도와 동자상이 중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포도가 무엇을 상징하는 식물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포도와 넝쿨에 다른 이미지를 중첩시켜 그리는 방식은 중국의 민간 연화에서도 발견된다. 우창(武強)의 민간 연화 중에는 용쟁호투의 장면을 포도로 이미지화한 작품이 있다.
전통사회에서 다남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조건이었다. 서민들은 백동자처럼 직설적으로, 또는 씨가 많은 과일이나 남근을 상징하는 채소를 통해 은유적으로, 민화를 통해 다남을 염원했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는 남녀차별이 점점 더 옅어지고 다산의 효용도 약해졌다.
양반이 되길 꿈꾸고 양반처럼 행세하길 바라다
민화 고사인물화는 실제로 전하는 작품이 많지 않지만, 기록상으로는 그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 조선 후기의 고소설 『옥단춘전』을 보면 월매의 집이 그림으로 가득해 언뜻 미술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 집에 붙어 있는 그림 대부분이 고사인물도다.
위수(渭水)가에 문왕(文王)이 만나러 왔지만 강태공(姜太公)이 곧은 낚싯대를 강물에 넣고 의연히 앉아 있는 모양을 그린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채석강의 밝은 달밤에 포도주를 취하도록 마시고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섬섬옥수를 넌지시 집어넣는 장면을 그린 「이태백급월도(李太白汲月圖)」, 한(漢)나라 종실(宗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러 풍설 중에 걸음이 좋은 적토마를 뚜벅뚜벅 몰아가는 모양을 그린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 네 노인이 바둑판을 앞에 놓고 흑기백기(黑碁白碁) 두는 모양을 그린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등이다. 『옥중가인』에 묘사된 월매의 집에 걸린 그림들은 『옥단춘전』에서보다 더 많은데, 모두 16점으로 그 가운데 고사인물화가 13점을 차지한다.
소설뿐 아니라 19세기 서울의 정경을 묘사한 『한양가』에서도 같은 추세를 읽어낼 수 있다. 광통교 아래에서 파는 그림들은 「구운몽도」 「강태공조어도」 「상산사호도」 「삼고초려도」 「귀거래도」 등 고사인물화가 주류를 이룬다. 18, 19세기 국문소설, 판소리, 무가(巫歌) 등 기록에 열거된 민화의 제재를 보면 단연 고사인물화가 압도적이다.
왜 민화에서 고사인물화 비중이 높은 것일까? 그것은 양반 문화에 대한 서민의 동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민화가 유행한 19세기에 양반 수가 급증했고 양반의 신분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는 양반이 세상을 지배한 조선의 기강이 흔들리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고사인물화는 사대부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장르인데, 서민들도 이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화로 표현된 고사인물화는 사대부 회화에서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바로 오랜 신분사회에서 뿌리박힌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과감히 바꾸려는 인식의 전환이다. 「삼국지연의도」에 등장하는 영웅을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끌어내리고, 백수의 왕 호랑이를 바보 호랑이로 전락시키며, 임금의 상징인 용은 뱀처럼 그리고, 봉황은 닭처럼 묘사했다. 어떠한 권위도 민화 속에서 금세 거세되어 그들은 평범하고 친근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서민들은 이러한 신분 변화 속에서 또다른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민화 「삼국지연의도」는 관성묘에 모신 예배화와 달리 그저 흥미진진한 이야기 그림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들도 더 이상 엄숙하지 않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민화 「삼국지도」에서는 장비가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고리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장팔사모를 움켜쥔 채 위세를 부리고 있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으나 다리 부근에 있는 무기와 깃발 등을 보고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를 눈치 챈 장비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조조 곁의 하후걸(夏侯傑)은 간담이 서늘해져 말 아래로 고꾸라지고 만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든 간에 한결같이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지나치게 이상화한 영웅보다 자신들처럼 평범하고 친근한 캐릭터를 원하는 서민의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민화 작가들이 추구한 삼국지 세계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민화에서는 하늘을 찌르는 영웅호걸들의 기상이 온데간데없다. 그들은 우리처럼, 아니 우리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된다. 민화 작가들은 나관중이 묘사한 영웅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각색했다. 중원을 호령하던 삼국지 영웅들을 우리처럼 평범한 존재로 내려앉혔다. 그것도 웃음을 통해서 아주 간단하게 말이다. 적어도 민화의 세계는 불필요한 권위의식을 용납하지 않고 평등을 추구한다. 그것이 민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소리 없는 메시지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의 민화 「강태공조어도(姜太公釣魚圖)」는 보통의 「강태공조어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등 뒤로 병사들이 떠들고 있지만 강태공은 꼼짝 않고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서백은 사모를 올려 쓴 단정치 못한 모습에 강태공의 눈치를 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기서는 강태공과 서백의 처지가 바뀌었다. 일흔이 넘도록 기다렸던 기회가 왔지만, 강태공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다. 그의 등 뒤로 말과 개 울음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민화에서는 정도를 지나쳤다. 병사들은 상관이 무슨 일을 하든 말든 시끌벅적한 모습이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기성의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인간적인 풍경이다.
이것이 바로 서민 입장에서 바라본 강태공 이야기다. 그림은 권력을 지닌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권위를 깎아내리고 힘없는 사람은 당당하게 그려 위상을 높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 이야기를 조선의 것으로 재해석한 면도 돋보인다. 중국이 아니라 조선의 옷에 조선인의 면면을 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 귀에 익은 까닭에 어느새 강태공 이야기가 우리 것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이야기 그림은 서민들이 좋아하는 제재다.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하는 이야기와 재담으로 뛰어난 어른이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이들 그림에서는 선하게 떠오른다. 중국 전래이고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실감나게 바꿔놓았다. 민화 속 이야기 그림은 중국 것이든 아니든 쉽게 우리 것으로 녹여 풀어놓는 수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권위에 어떤 원칙에 전혀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자유로움이 돋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민화에서 이야기 그림이 유행한 것은 양반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양반을 꿈꾸고 양반처럼 행세하며 양반 문화를 선망하는 서민의 바람이 그림 속에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천 동자를 이끌고 남해를 거쳐간 진시황, 선도산의 성모 설화가 탄생한 배경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하는 위업을 성취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진시황은 신하들에게 오래 사는 방책을 찾게 했다. 사회적 행복을 쟁취했던 그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로서 넘볼 수 없는 행복까지 가지려 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를 오랫동안, 될 수 있는 한 영원히 지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는 불사약인 불로초를 구하려고 서복(徐福) 혹은 서불(徐巿)이라 불리는 신하와 동자 3000명을 동쪽 나라, 즉 한국과 일본으로 보냈다. 그가 부산, 거제도, 남해, 제주도까지 거쳐간 흔적이나 설화를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한국에서는 불사약을 찾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일본에 이르러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장수의 유토피아가 있다는 믿음이 퍼져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장수를 염원하는 그림이 발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십장생도(十長生圖)」다. 장생도는 중국에도 있지만, 열 개의 도상을 하나의 세트로 조합한 십장생은 우리나라에서만 보인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동경인 버밍햄미술관의 「십장생 동경」은 고려시대 십장생 도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소나무, 대나무, 사슴, 학, 거북, 산, 구름, 돌, 물, 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도상은 고려 때 이색(李穡, 1328~1396)이 건강을 회복하고 오랫동안 살기 위해 세화(歲畫)로 제작한 「십장생도」와 그 도상이 일치한다.
고려시대 십장생은 조선 전기 성현(成俔, 1439~1504)의 글에서 해·달·산·내·소나무·대나무·거북·학·백록·영지로 도상의 조합이 약간 바뀐다. 구름과 돌 대신 달과 영지가 등장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십장생도」에 해·산·거북·학·대나무·소나무·영지·물·사슴과 더불어 반도(蟠桃)가 등장한다. 반도는 이 시기에 유행한 서왕모의 신선 사상과 연관이 깊은 나무다. 「십장생도」는 고려 때에는 민간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궁중의 세화용으로 그려졌고, 후기에는 궁중 잔치인 가례(嘉禮) 때 10첩의 병풍으로 제작되었으며, 19세기에 민간으로 널리 퍼지면서 민화로 그려졌다.
서왕모와 관련된 그림도 「십장생도」 못지않게 많이 제작되었다. 「요지연도」 「반도도」 「동방삭도」 등이 그러한 예다. 서왕모는 서역 곤륜산에 사는 중국 신들 가운데 왕으로, 장수를 상징하는 서방의 유토피아를 주재한다. 서왕모 설화는 신라시대에 선도산(仙桃山)의 성모(聖母) 설화로 신라화될 만큼 고대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신선이나 신라의 천마도 등도 신선 사상과 관련된 도상들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양 난 이후 신선 사상이 부흥하면서 서왕모 신앙과 관련된 신선도가 다수 제작되었다.
서왕모는 자신의 생일인 3월 3일에 주나라 목왕과 여러 신선을 초대해 궁궐 옆에 있는 요지(瑤池)에서 잔치를 벌였다. 서왕모의 생일잔치를 그린 그림을 「요지연도(瑤池宴圖)」라 부른다. 이때 요지 옆에 있는 복숭아밭인 반도원에서 딴 반도를 메뉴로 제공하기 때문에 반도연(蟠桃宴)이라고 한다. 반도는 가지의 길이가 3000만 리나 뻗어 있고, 3000년 만에 한 번 꽃을 피우며 다시 3000년 뒤에 열매를 맺는 복숭아다. 이 복숭아를 먹으면 장수한다고 하여 장수의 상징이 되었다.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도 장수에서 빠질 수 없는 그림이다. 수성노인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남극성(南極星)의 화신으로 장수를 상징한다. 짧게 수노인(壽老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남극성에 사는 노인이란 뜻으로 남극노인(南極老人)이라고도 한다. 그는 3척의 작은 키에 몸과 머리 길이가 반반이며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빼어난 모습을 지녔다.
장수는 인간의 원초적 소망이자, 지금도 장수를 위한 여러 산업이 각광을 받을 만큼 모든 개개인이 바라는 행복의 조건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장수를 기원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다. 민화에서는 불사약이 나는 장수의 나라라는 자부심답게 「십장생도」가 기본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서방에 있는 서왕모 설화와 관련된 그림도 제작되었다.
용문을 뛰어오른 단 한 마리의 잉어, 수탉의 벼슬과 공작의 꼬리털이 담은 의미
출세란 높은 벼슬에 올라 많은 봉급을 받고 안정되며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늘 자식이나 자손들이 귀하게 되기를 바라는데, 여기서 귀함이란 높은 지위, 높은 벼슬을 일컫는다. 그 높은 벼슬은 오늘날 월급처럼 보수로 받는 녹봉(祿俸)의 녹(祿)으로 대변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에서 문자로 표현된 길상어(吉祥語) 중에서 복(福)·수(壽)·다남자는 많으나 녹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인보다 가족의 행복을 우선시했던 조선시대의 가족주의적 성향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잉어는 출세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민간에 많이 알려진 등용문(登龍門)의 고사가 바로 잉어가 용이 되는 출세 이야기다. ‘어변성룡(魚變成龍)’ 또는 ‘어도용문(魚跳龍門)’이라 부른다. 360마리의 잉어가 황하를 거슬러 올라와 용문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새끼를 낳아 실제로는 이미 숫자가 3600여 마리가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용감할뿐더러 신령스러움을 갖춘 한 마리 잉어만이 용문을 뛰어오를 수 있다. 용문에 오른 잉어는 잇몸 아래쪽에 36장의 비늘이 거꾸로 돋으며 몸을 흔들어 용으로 변하는데, 어떤 물건이라도 그 거꾸로 선 비늘에 한 번 닿기만 하면 곧 부서져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용문에 오르지 못한 잉어는 뺨 위에 흑점이 찍힌다.
중국의 「이어도용문」은 등용문의 고사대로 용문을 앞에 두고 한 마리 잉어가 용문을 통과하기 위해 U자를 그리면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같은 제재를 한국 민화인 「어변성룡」에서는 우리 식으로 변용시켰다. 잉어가 목표로 삼은 대상이 용문이라고 쓰여 있는 패방 대신 구름 위로 떠오르는 해로 대체되었다. 중국 마을의 입구를 표시하는 패방은 우리에겐 낯선 문화다. 그런 까닭에 잉어가 해를 품어 용이 된다는 숭고한 광경으로 표현한 것이다.
민화의 책거리도 출세를 염원하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원래 책거리는 18세기 후반 정조가 패관잡기(稗官雜記) 대신 고전을 장려해 문체를 순화시키고 학문을 증진시키기 위해 화원들로 하여금 제작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고관대작들이 본떠서 자신의 집 안에 설치했다. 책거리가 다시 민간으로 널리 퍼지면서 학문에 진보를 보이는 것과 같은 거대한 포부가 아니라 책 읽고 공부 열심히 하며 과거급제를 해 출세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으로 의미가 변한 것이다. 또한 책거리에는 사슴, 수탉, 공작 등 출세를 상징하는 기물들이 곳곳에 배치되기도 한다. 사슴(鹿)은 녹(祿)과 발음이 같아 출세를 의미하고, 수탉의 벼슬이나 공작 꼬리털은 그 화려함 덕분에 출세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이 교육과 대학입시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은 막대하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쏟는 정성과 경제적인 투자는 자식의 앞날을 위한 것이다. 대학 수능 입시날 국가 전체가 출근 시간을 늦추고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것도 이러한 국민적 관심에 따른 것이다. 민화에서도 다른 상징 못지않게 출세를 위한 그림이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그러한 관심이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민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충실하다
민화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행복이다. 장수로부터 가정의 행복,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행복에서 사회적 행복까지 망라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시한 것이 가정의 행복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려는 소망이 민화 속에는 넘쳐난다. 그러한 점에서 민화는 행복이 가득한 그림이다. 복을 많이 받고 출세하며 오래 살게 되니, 이보다 더 행복한 그림이 어디 있겠는가? 행복은 민화의 키워드이자 다른 회화와 구분되는 중요한 상징코드인 것이다. 민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대부분 행복을 추구하는 상징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그 이미지가 더욱 소중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것이다.
민화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 격조와 이성의 세계를 중시하는 문인화와 달리 민화에서는 감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민화 속에 펼쳐진 행복의 세계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탈권위적인 성격을 띤다. 우아함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이념적이기보다는 따뜻한 인간미를 중시하며, 권위로 지배하기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서민의 정서와 감성과 위상이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 민화는 궁중 장식화나 문인화와 더불어 행복이라는 공통된 가치를 추구한 그림이지만, 이들과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민화의 상징세계가 이들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귀족적이고, 권위적이며, 이상적인 세계를 대중적이고, 해학적이며, 현실적인 코드로 풀어나간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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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 사람들의 바람을 담은 민화 – 그림으로 본 조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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