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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엽서 하나
여기 사진엽서 하나가 있다. 흰 테두리 인화지처럼 보이는 사진 속에는 밝은 빛깔의 한복을 입은 두 여인과 경회루가 있다. 컬러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인위적인 색감이고,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녹음이 깃든 누각으로 가는 연못 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두 여인은, 당대의 다른 엽서를 참조해보건대 기생의 분위기를 풍긴다. 엽서 뒷면을 보면 일본어, 한자, 영어로 인쇄된 글자들이 나온다.
“POST CARD 郵便はかき 京城 景福宮 慶會樓 BANQUETING HALL, WHICH IS SEEN ACROSS THE POND KEIFUKU PALACE CHOSEN(KOREA) THE GOVERNMENT RAILWAYS OF CHOSEN 朝鮮總督府鐵道局 發行.” “우편엽서/ 우편은 아래에 쓸 것/ 경성 경복궁 경회루 연회장, 연못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 게이푸쿠 궁/ 조센(한국) 조센철도국/ 조선총독부철도국 발행”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뒷면에는 소인이 찍힌 우표가 붙어 있고 또박또박 연필로 쓴 일본어 글씨도 있다. 보낸 이는 북경시 서성보자가(西成報子街) 59호에 사는 마쓰나가 아이코(益永愛子)이고, 받는 이는 북만 동안성 밀산(密山) 만주 제803부대 대장대(大場隊) 병사 미야무라 다쓰오(宮村辰男)이다. 내용은 이렇다. “군인 아저씨, 그 후로 잘 지내셨습니까? 저도 잘 있습니다. 그간 사진엽서를 잃어버려서 (…) 다른 그림엽서를 보냅니다. 우리는 2학기 시험이 시작되었어요. 인형이랑 그림, 책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인형만 보냅니다. 10월 8일부터 제5차 치안강화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몸조심을 한다면 괜찮겠지요.”
우리는 이 엽서 한 통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보낸 이와 받는 이를 보건대, 북경에 사는 일본인 ‘소학교 생도’가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보낸 위문엽서인 듯하다. 이 학생의 주소가 북경이라면, 일본 민간인이 북경에 살 수 있었던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 침략 이후에 보내진 것이리라. 그런데 북경에서 만주로 보낸 엽서가 중국이 아닌 조선의 풍경을 담고 있다. 중국 사는 일본인 여생도 아이코는 조선에서 발행된 엽서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아이코의 아버지가 혼자 조선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산 기념품에 섞여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아이코의 가족이 일본에서 북경으로 오는 길에 조선 여행을 하면서 산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연유에서 어린 아이코가 이 엽서를 중국에서 만주로 부치는 위문품으로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의 사진 이미지를 담은 엽서는 일본에서 조선, 만주, 중국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이 엽서를 통해, 1930년대 중반 일본 제국의 신민들이 조선의 역사를 기생의 형상으로 은유하는 사진 이미지를 어린 나이의 학생부터 최전방의 군인에 이르기까지 향유하던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사진엽서, 근대 여행자의 시각적 체험의 장(場)
사진엽서는 근대적인 통신체제 하에서 소식을 간략히 전달하는 우편물인 엽서의 한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회엽서(繪葉書)’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제작 초기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 대개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대개는 흑백 사진을 인쇄하여 사용했지만, 점차 사진을 모사한 일러스트라든가 흑백사진에 채색 인쇄를 하여 장식을 가미하는 등, 사진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2차 가공을 한 엽서 형태로 제작되었다.
사진엽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우편물로서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였을 뿐 아니라 대단한 수집 열풍의 대상이기도 했다. 다종다양한 조선의 이미지를 담은 사진엽서 또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관광기념 상품으로 제작·판매되었고, 실제 우편 기능보다는 사진 이미지를 완상하고 수집하는 대상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런 까닭으로 1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에도 상당수의 사진엽서가 남아 있다.
사진엽서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관광(tourism)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사실 여행의 본질은 전근대 시기나 근대나 다를 게 없다. 살고 있던 정주지를 떠나 낯선 곳으로 발을 옮겨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런데 전근대 여행(travel)의 경우 소수의 사람이 종교적 순례나 장사 또는 여가를 목적으로 위험하고 힘든 여정과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고 떠나는 일시적인 사건이었다면, 근대 여행은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편안하고 편리하게 다닐 수 있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소비되는 상품으로서, 하나의 제도화된 여가이고 소비활동이 되었다.
근대 시기 관광이 전근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시각성이 여행 체험이나 제도적 측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근대 관광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토머스 쿡(1808~1892) 목사가 기획한 관광 상품의 주요 코스가 대도시의 박람회, 박물관, 백화점이었다는 점은 근대 관광이 전적으로 ‘보는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근대 관광이 갖는 시각중심성은 교통수단 및 인쇄매체의 발달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철도를 비롯한 대중교통은 그 속도로 인해 여행자에게 시각적 특권을 부여했다. 걷거나 나룻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시각을 포함하여 주변 환경을 오감을 통해 체험하지만,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차창 밖 풍경을 파노라마의 연쇄로 조망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기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차창 밖 대신 자신이 도달할 목적지에 대한 안내서를 읽거나 지나온 곳에서 가져온 사진엽서를 꺼내보기 십상이다.
또한 ‘관광’이라는 근대적인 소비문화가 탄생하는 데에 기반시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왜 그곳이 여행지로 갈 만한지, 숙박할 곳은 어디이며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지, 볼거리는 무엇이 있는지 알려줄 정보를 담은 안내 책자나 여행기, 사진엽서, 팸플릿, 포스터, 기행문 같은 인쇄매체가 함께 발달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매체들은 여행객으로 하여금 관광지에 가기 전에 미리 그곳에 대한 상상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이렇게 근대 관광은 보는 체험을 발달시키고 또 이를 재현한 물건을 판매하고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산업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이제 근대 시기 관광객은 미지의 세계를 직접 부딪혀 체험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관광객은 이미 규정된 이미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그곳을 경험한다. 각종 관광선전물은 관광지에 대한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반대로 관광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대상을 시각화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엽서는 단지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은 누구나 손바닥만 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필름 인화비용 걱정 없이 찍고 싶은 대로 찍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20세기 초는 개인이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을 하거나 인화된 사진을 소유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였다. 당시 카메라는 고가이자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물건이었으며, 인화된 사진을 손에 넣으려면 적지 않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1925년 라이카 사가 본격적으로 소형 카메라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카메라는 소수의 사람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엽서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사진엽서는 비록 인화 사진이 아닌 인쇄 사진을 싣고 있지만, 비교적 양질의 사진 이미지를 제공해주었다. 사람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사진엽서를 구매함으로써 다양한 종류의 시각 이미지를 접하고 또 소유할 수 있었다. 금강산이나 경주처럼 자신이 가본 곳은 물론이려니와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조선의 풍속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행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기념품으로 구매한 사진엽서는 자신이 체험한 경험을 시각적인 매체로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으로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여행이 보는 체험에 집중되고 또 이 체험을 보존할 수 있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근대 여행의 시각중심성을 말해준다면, 사진엽서는 근대 관광 초창기에 관광의 시각적 체험을 집약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적인 관광산업을 시작한 곳은 일본이었다. 1903년 ‘일본여행’이라는 여행사가 등장하여 처음에는 국내 종교순례객을 모으다가 이내 대륙시찰단을 비롯한 각종 단체여행을 조직했다. 조선에 온 일본인 해외단체관광은 신문사의 기획에서 시작되었다. 1906년 6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만한순유단이라는 350여 명의 인원으로 해외여행단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전승지를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짰다. 1912년에는 반관반민의 관광업체인 일본여행협회(Japan Tourist Bureau, JTB)가 조직되어 각지에 지부를 설치했고, 조선에도 경성관광협회나 부산관광협회를 조직했다. 호텔이나 여관 등의 숙박업소와 요리집, 사진업, 토산품판매점, 옷가게와 백화점, 택시업체, 선박운수업체, 권번업자, 문구인쇄업체 등으로 이뤄진 이 관광협회들은 조선에 관광산업을 유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만주, 타이완, 한반도를 통틀어 ‘신내지(新內地)’라고 명명하고 1910년 이후에는 이 식민지 지역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여러 종류의 책자를 출간했다. 또한 1910년대 후반 일본에서 각지의 여행안내서 간행 붐이 일면서, 조선총독부에서도 전국 도시 역에 만선(滿鮮) 안내소를 설치하고, 일본 문부성은 만주와 조선으로 수학여행이나 단체관광을 가도록 권장하는 등 조선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1930년대가 되면 경성, 금강산, 경주, 평양, 부산, 청진 등 조선 전역에 걸쳐 관광지가 개발되어 숙박과 교통시설이 갖춰진다.
다게르의 사진 발명 40년, 조선에 처음 들어선 사진관
일제가 1910년대부터 각지를 근대적인 관광산업의 장소로 재편하면서, 사진엽서는 조선에서도 손쉽고 저렴하게 소비되는 관광 상품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누가 사진엽서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사진엽서를 만들려면 우선 사진술이 발달해야 한다. 서양의 사진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프랑스의 다게르가 유리건판 사진을 만든 지 40여 년이 지난 1883년의 일이다. 사진술을 도입한 사람은 화원, 서화가 출신이자 개화관료였던 김용원(1842~1892), 지운영(1851~1935), 황철(1864~1930)이었다. 이들은 국내에 사진관을 개설했고, 지운영은 고종 어진을 1884년 조선인으로서는 처음 촬영했다. 화원이자 고종의 밀사이기도 했던 김용원과 지운영은 갑신정변의 발발로 사진 도입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1907년 김규진(1868~1933)의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이 왕실의 후원으로 개설되기까지 약 20년간은 일본인들이 사진술을 도입하고 정착시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경성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하는 일본인 사진관들이 개설되어, 사진사가 1893년에 2명이었던 것이 1911년에는 51명으로 늘어났다. 1899년경 문을 연 후지다 쇼자부로의 옥천당(玉川堂), 1898년 경성에 자리잡은 이와다 가나에의 암전(岩田) 사진관, 그리고 기쿠다 신이 1899년 문을 연 국전(菊田) 사진관 등이 주로 황실이나 귀족 등의 상류층을 고객으로 삼으면서 사진을 찾는 고객이 점차 늘어갔다. 김규진이 천연당 사진관을 연 이후 경성 지역의 사진사는 1930년에 344명으로 늘어나고 조선인 사진사도 168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사진업은 큰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인 사진업자와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생산되었다. 이들이 찍은 사진은 인화 사진으로서만이 아니라 인쇄물 형태로 대량으로 제작되어 소비·유통되었는데, 이 인쇄물 중 수량과 내용에 있어서 방대하고 다양한 것이 사진엽서였다. 1901년 본정(本町) 2정목(丁目, 지금의 충무로 2가)에 설립된 대표적인 사진엽서 제작소인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에서 하루 판매량이 1만 매를 웃돌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가장 많은 양의 사진엽서를 수집하여 보유하고 있는 부산박물관에 따르면, 사진엽서의 이미지 종류는 4800여 종이고, 대개 1905년에서 1939년 사이 제작하여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들을 보면 민간에서 만든 사제엽서의 양이 관제엽서보다 많았고 민간 제작자의 범위도 넓어서 100여 군데가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이쇼 하토사처럼 일본에서 제작한 엽서도 있었지만, 대개는 조선에서 발행되었다.
최대 발행처인 히노데상행을 비롯하여 암전 사진관 등 사진관이 주요한 발행처였는데,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진다. 부산의 박문당(博文堂)과 부산오죽당(釜山吳竹堂) 등 책을 판매하는 상점과 서점도 엽서를 발행했고, 관광지로 개발된 지역에서는, 금강산 사진을 취급한 원산 덕전사진관(元山 德田寫眞館)처럼 해당 지역의 전문사진관이나 식당, 다옥(茶屋)에서도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제엽서로는 관광 업무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나 조선철도호텔협회가 제작했고,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경성관광의 필수 코스인 조선신궁(사무소)에서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1915년에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에 개최한 조선박람회처럼 조선 및 경성관광을 유치하기 위한 대규모 행사에서는 협찬회나 사무국 등 행사 주최기관이 직접 기념엽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진열관과 전시 규모를 통해 식민지 경영의 실적을 선전하는 의도에 걸맞게 기념엽서 또한 각종 컬러 애니메이션과 도안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제작하였다.
사진엽서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이 글 맨 위에 소개한 엽서에서 보았듯이, 간단한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사진엽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제작자와 발행처가 누구인지 글씨와 마크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엽서로 쓰인 경우 우표와 소인, 발신자·수신자의 주소를 통해 오고 간 지역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행사를 기념하는 경우 제작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독특한 도안과 레이아웃을 가지고 제작사와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진 이미지를 감상하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여러 가지 기호와 텍스트이다.
경성 시가를 담은 사진엽서를 보자. 남산 쪽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경성 시가를 원거리에서 찍은 이 사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俯瞰)의 각도와 포괄되는 시야의 각도를 고려할 때 하늘에서 촬영한 듯하다. 사진 아래에 “조선명소(朝鮮名所) 경성시가전경 일부(京城市街全景の一部)”라는 제목과 함께, 옆에 작은 글씨로 쓰인 “산기슭 흰 건물은 총독부 신청사(山麓の白羊館は總督府の新廳舍)”라는 해설이 달려 있고, ‘(朝鮮名所)’와 ‘(景38)’이라는 캡션이 함께 있다.
우리는 이 엽서가 제작된 시기를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제목을 ‘신청사’라고 지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진 촬영 시점은 총독부 신청사가 지어지고 바로 얼마 뒤일 것이라고, 따라서 1926년 10월 1일 전후일 것이라고 말이다. 제목과 해설 옆에 부기된 캡션은 사진엽서가 조선명소 시리즈의 38번째임을 표시해준다. 이것은 제작자가 부여한 분류 체계에 ‘조선명소’라는 것이 있고, 따라서 이 사진은 조선명소의 하나로 자리매김된 것임을 말한다. 이 엽서에서 보듯이 사진엽서에 쓰인 문자는 일반적으로 한자를 포함한 일본어와 영어였다. 일본어가 사진엽서를 제작한 주체의 국적과 대표 언어를 밝히는 것이라면, 영어는 당시 사진엽서가 국제적인 우편제도의 일환으로 편입되어 있음을, 그리고 서양인을 식민지 조선의 관광 고객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이 엽서를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엽서의 사진을 감상해보자. 조선에 처음 온 일본인 또는 서양인 관광객이라면, 여러 종류의 건물과 시가지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사진을 훑어본 뒤, 사진 밑에 쓰인 글을 읽고, 다시 이미지를 볼 것이다. 제목과 해설은, 이 사진이 일제가 만든 새로운 경성 시가로서 식민지 조선의 명소이며, 특히 산기슭에 세워진 흰색 건물이 이 사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물이라고 콕 집어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관광객은 아마도 이 사진 전체를, 위용을 자랑하는 흰색 건물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진의 캡션은 신청사 뒤에 있는 옛 건물들, 즉 신청사가 가로막고 있는 경복궁을 언급하지 않은 채, 원거리로 포착한 사진 이미지에서 그 옛 건물들을 말 그대로 무시하고 있다. 원경으로 경성 시가의 일부를 포착한 이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서양식 건물들, 널찍한 터를 확보하고 서 있는 높은 건물들이다. 이렇듯 제목과 해설은 촬영자 또는 제작자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의 주제와 주목할 대상을 좀 더 직접적으로 지시해주고, 피사체에 대한 그들의 시선과 해석을 드러내준다.
‘조선 풍속’이라는 범주
그렇다면 사진엽서에 담긴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부산박물관에 소장된 엽서를 한번 쭉 훑어보면, 사진 종류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명승과 유적이다. 강산과 온천 같은 명승 지역과 경성이나 평양, 경주 같은 역사 유적처럼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관광지로 개발한 곳의 풍경을 소재로 한 엽서가 가장 많다. 다음으로는 ‘풍속’과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이다. ‘풍속’ 시리즈에는 조선인의 일상생활 전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이 들어 있는 데 비해 근대화된 도시의 모습에는 경성과 부산, 청진 등 일제가 개발한 도시의 도로나 건물, 전기 등 근대적인 시설들이 ‘명소’라는 표제 하에 모여 있다.
우선 ‘풍속’이라는 주제부터 살펴보자.
아이들은 한말부터 풍속사진의 소재로 즐겨 쓰였다. 애잔함과 천진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아이 업은 작은 소녀의 모습은 일러스트로 다시 그려지기도 했고 ‘女兒の水汲 Drawing Water’, 즉 물 긷는 여자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카메라맨 앞에서 부끄러워하면서도 활짝 웃는 여아의 모습이, 물동이를 머리에 인 고된 일상을 무색하게 한다. 골목에 나와 놀다가 낯선 카메라 앞에 모여든 아이들을 막 포착한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사진 속 아이들도 수줍고 해맑기는 마찬가지다.
조선풍속 사진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상생활 전반을 담고 있었다. 논밭 갈이나 모내기, 방아질, 절구질, 물긷기, 짐나르기, 양잠, 김장, 빨래, 다듬이질 등 노동하는 일상이나, 재래시장의 전경, 점포, 주막과 지게꾼들의 장터 풍경, 배와 뗏목이나 달구지 또는 가마 등의 탈것, 혼례와 장례 등의 의례, 널뛰기나 활쏘기 같은 놀이까지 망라했다. 실생활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어진 전통적인 관복이나 양반 복식을 입혀 연출하기도 했다.
조선풍속으로 완상된 또 다른 주제는 젖을 내놓은 여인의 모습이다. 짧은 저고리 때문에 가슴을 동여매는 천을 치마와 함께 입었던 1900년대까지, 하층민 여성들이 물동이를 한 손으로 받쳐 이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가슴이 살짝 노출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은 이 모습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때로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포착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실내의 사진관에서 가슴을 일부러 드러내놓도록 연출하기도 했다.
함흥 옥치상점에서 발행한 사진을 보자. 지붕을 얹은 공동 우물가에 물 긷고자 나온 세 명의 각기 다른 나이의 여성은 물동이를 인 채 카메라 쪽을 향해 서 있다. 맨발로 홑겹의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차림새를 보면 여름이다. 가운데 있는 젊은 여성은 물동이를 한 손으로 이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노출되자 다른 팔로 가슴을 가린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물동이를 인 또 다른 여성 사진을 보자. ‘婦人の水運ひ(여성의 물 운반)’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실외가 아니라 사진관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여 찍은 사진이다. 앞 사진의 여성들이 무명으로 된 치마를 칭칭 동여맨 것과 달리 이 사진 속 여성은 삼베나 모시 질감의 치마를 헐겁게 입었다.
이번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여성의 사진을 보자. 부산 오죽당서점에서 발행한 ‘鮮人の子守(아이를 기르는 조선인)’이라는 제목의 사진 속 여인은 들판 수풀 한켠에 앉아 포대기를 풀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자 앞섶을 올렸는데, 사진사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경계심이 어려 있다. 반면 ‘어머니와 아이’라는 제목의 사진 속 여성은 아이에게 젖을 물린 것도 아닌데, 아이를 업은 채 가슴을 일부러 밖으로 내놓은 채 서 있다. 이 또한 사진관에서 일부러 포즈를 취하게 한 연출 사진이다. 이런 탓에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은 무심한 듯 멍하다.
‘조선풍속’이라는 표제를 달고 만든 엽서세트는 조선풍속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일곱 가지의 사진 이미지를 일러스트로 가공한 이 엽서들에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장인, 활쏘기를 하고 있는 노인들, 검무를 추고 있는 여성, 기생과 함께 서 있는 경복궁 경회루와 대동강 부벽루, 장승 뒤에 멀찌감치 삿갓 쓰고 노새를 타고 가는 과객, 물가에서 빨래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들이 등장한다.
조선풍속이라는 범주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학적인 은유로 전형화된다. 이 은유에 빠지지 않는 연결고리가 여성이다. 풍속과 아리랑 음악이라는 제목을 붙인 엽서세트를 보자. 전통 한복을 입은 조선 여성이 석양이 지는 산길에 꽃을 들고 서 있고, 장승 옆에 앉아 양산을 옆에 둔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때로는 기타를 들고 서양식 건물의 문턱에 걸터앉아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른다. 엽서 뒷면의 글귀가 ‘至誠奉公乘切れ時局’ ‘一億のかて築け新體制’ ‘締のよ一億心の手綱’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모토로 한 신체제 운동 시기인 1930년대 말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 엽서는 애수에 찬 표정의 여성과 애수 띤 아리랑 타령의 가사를 묶어 제시하고 있다.
순례와 탐승의 길, 금강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명승과 유적은 일제가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발굴한 지역의 모습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명승은 금강산이었다. 금강산은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고려 땅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이라고 한 당나라 이정(李靖)의 말이 전해 내려올 만큼 중국과 일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조선을 대표하는 명승지이다. 하지만 금강산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정책적으로 여행산업을 부양하면서다.
1914년 경원선 철도가 완공된 후 일제 당국은 금강산 여행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15년 『매일신보』가 “금강산탐승회(探勝會)” 모집 광고를 내는 한편, 같은 해 총독부가 개최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는 강원도가 출품한 금강산 모형이 전시되었다. 1919년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이르는 금강산 철도가 착공되어 1931년 전 구간이 완공되기까지 금강산에 가기 위한 교통 편의시설이 꾸준히 개발되면서, 철도 직영호텔 같은 숙박시설도 확충되었다. 그리하여 금강산 철도 이용 승객은 1926년 881명에서 1931년 1만5200여 명, 1939년에는 2만4890여 명으로 증가한다. 강원도 고성군과 통천군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는 금강산에 접근하는 교통시설이 편리해짐에 따라 1930년대가 되면 금강산 여행은 더욱 대중화된다.
1931년부터는 경성에서 떠나는 열차에 침대차를 연결하여 내금강까지 직통으로 가는 철도편이 생긴 데다, 안변역에서 외금강행 열차를 타거나 철원에서 금강전철로 갈아타고 내금강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금강의 경우 밤 9시45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내금강역에 내려 장안사-명경대-표훈사-만폭동-마가연(摩訶衍)-묘길상-장안사를 들러 다음 날 밤 9시 30분에 경성역에 도착하는 코스로도 다녀올 수 있었다. 이 무박2일 코스는 기차와 전차를 4등칸으로 탈 경우 11원의 비용으로 산정하였다. 당시 중고등학교 조선인 교사 월급이 월 40~50원 정도였으니, 조선인이라고 해서 엄두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인 수학여행이나 탐승단을 중심으로 금강산 관광 붐이 일었다.
금강산과 관련된 여행안내서나 팸플릿, 여행기, 사진집, 엽서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엽서도 비로봉, 망군대, 만폭동, 구룡연, 해금강, 총석정 등 내금강과 외금강의 수십 군데 명소를 별도로 찍어서 세트로 만들었다. 외금강 온정리에 있는 금강산 전문 기념품 제작소인 덕전상점(德田商店)이 발행한 해금강 사진엽서 8종 세트의 경우 송도, 총석정, 일출, 삼일포, 부처암 등에 대해 일어와 영어로 비교적 자세한 캡션 해설을 싣고 있다.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 금강산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기만 할 수 있는 ‘탐승지’가 아니었다. 정작 조선을 대표하는 금강산을 조선인이 아니라 일제가 만든 안내서에 의존하여 찾아가야 하는 것이 조선인이 처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광수는 1921년 금강산에 다녀와 기행문을 남기며 그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과 한 나라에 태어난 조선 사람들까지 남들에게서 (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슬픈 일이외다. (…) 만일 우리가 금강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잇섯슬진대 우리의 자매와 자녀들이 보통학교를 마초기 전에 벌서 금강산의 위치, 명소의 배치와 명칭, 그 사진과 화첩, 그 시와 노래를 보고 외왓서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가질 복이 업는 나는 철도의 안내를 유일한 신뢰로 금강산 구경을 떠나는 불행아가 되엇습니다.
이에 나는 부족하나마 내 손으로 우리 금강산을 우리 조선사람 중에 소개해보자 하는 야심을 발하엿습니다.
- 이광수, 「金剛山遊記」, 1924
더욱이 조선 사람에게 금강산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금강산에서 민족을 발견했다. 최남선에 따르면 금강산은 “조선심의 물적 표상, 조선 정신의 구체적 표상으로 조선인의 생활, 문화 내지 역사에 장구코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성적(聖的) 일존재(一存在)”, 옛날에는 “생명의 본원, 영혼의 귀지처(歸止處)”이기까지 했다. 이광수의 표현으로는 “내 영의 세례를 받”을 “위대장엄한 자연”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탐승’의 길이 아니라 민족의 앞날을 찾고자 하는 순례와 치성의 길이었다.
원컨대 민족의 진로를 밝히 찻고져 과연 오늘날 우리 땅의 사상계는 혼돈합니다. 그 탁랑(濁浪)에 눈을 뜰 수가 업습니다. 원컨대 이 속에 일조의 청류(淸流)가 어듸로서나 흘러들어오소서 하고 빌고져.
이리하야 나는 금강산 구경의 길을 떠낫습니다. 순례의 길을 떠낫습니다. 치성의 길을 떠낫습니다.
- 이광수, 「金剛山遊記」, 1924
퇴락한 궁궐과 근대화된 도시
사진엽서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궁궐의 모습이다. 경복궁 광화문,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창덕궁의 돈화문, 인정전, 후원, 창경궁의 창경원, 식물원, 동물원, 덕수궁의 대한문, 중화전, 석조전 등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갖가지 궁궐 전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은 사진에 나타나지 않은 것들을 가리는 식민통치의 엄폐막이다. 조선의 왕이 거처하는 곳, 권력의 상징인 궁궐은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한동안 황폐해졌다. 총독부는 이내 궁궐을 여러 용도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각을 부수거나 옮기기도 했으며 단장하기도 했다. 없애버린 전각 위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었고, 곳곳에 벚꽃나무를 심었으며 식물원과 동물원까지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통째로 들어내 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옮겨놓았다.
그러므로 제자리에 서 있는 광화문의 모습이 사진엽서에 실려 있다면 그것은 1926년 이전에 촬영된 것이다. 옮겨진 광화문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8년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것을 걷어내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한 것은 2010년이 되어서였다. 그러므로 사진엽서가 전해주는 아름다운 궁궐의 모습은 사실상 조선왕조 자체의 흔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일제가 파괴하고 덧칠하여 만든 노스탤지어, 더 이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아련한 옛 추억거리로 전락한 ‘퇴락한 과거’의 이미지이다.
오래된 건축물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일제가 새로 지은 서양식 건물과 기관의 모습이다. 경성의 일본인 상권 지역인 본정(本町) 1정목(丁目), 전차가 다니는 남대문통, 자동차가 가득 주차되어 있는 조선호텔, 용산 총독관저, 동양척식회사, 용산한강인도교, 백화점 건물, 신사와 조선신궁 등이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경성 명소를 16곳으로 추린 엽서세트에는 왕궁과 신식 건물 그리고 일본의 통치종교 기관이 함께 나열된다. 경회루, 해태상을 없앤 위에 벚꽃이 만발한 광화문 앞, 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 창덕궁의 비원, 흰옷을 입은 기생이 산책하는 경복궁의 뜰이 하나의 묶음이라면, 대한제국 때 지은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과, 조지아, 미쓰코시, 미나카이로 이어지는 백화점 건물, 이왕가 미술관과 총독부 박물관, 남산 왜성대(현재 중구 예장동 지역)에 있던 구조선총독부청사는 일제가 선전하고 싶어하는 신식 건물들이다. 또 다른 묶음은 경성신사, 조선신궁,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사당인 박문사이다. 이 건물들은 해방 직후 조선 사람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거나 조선신궁처럼 훼손을 피해 미리 자진 철거함으로써 사라졌다.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다. ‘북선 제일의 개항장, 빛나는 청진’ 엽서세트가 있다. 여기서 청진은 만주에 진입하는 관문이며 상업과 산업의 중심이라고 영어로 소개하면서 청진이 대도시이자 문화도시로서 북선 지역에 군림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이미지는 청진 세관지서, 만주국 세관 같은 서양식 관공서 건물이며,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와 서 있는 전신주이다.
조선 이미지의 공장, 사진엽서
서양인과 일본인 관광객은 이 사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했을까? 이 지면에서 살펴본 사진 이미지는 매우 한정된 것일 뿐. 사진엽서에 담긴 이미지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사실상 사진엽서는 조선의 산하와 도시, 풍속과 사람들을 망라하여 그 이미지들이 복제되어 나오는 공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이 사진엽서라는 공장에는 시간의 질서가 없다. 사진엽서 안에는 사진이 언제 촬영되었고 언제 엽서 형태로 인쇄되었는지 직접 알려주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몇몇 사례에서 보았듯이 사진 이미지를 보고 촬영 연대를 추정한다든가, 조선박람회 기념엽서처럼 특정한 이벤트를 기념한 엽서는 그 이벤트의 날짜로 제작 연대를 확인하며, 유명 제작업체의 경우 엽서의 도안을 보고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정도이다. 또한 사진 촬영 시점과 엽서 제작 시점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37년에 제작된 사진엽서라 하더라도 거기 실린 사진은 1905년에 찍힌 것일 수 있다. 특히 ‘풍속’의 범주로 분류되는 엽서 속 사진은 대개 1900년대에서 1910년대에 서양인 여행객을 위해 촬영한 것이거나, 1920년대 총독부의 생활조사사업에서 찍은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이 사진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풍속엽서에서 계속 활용되었고, 때로는 동일한 사진 이미지를 일러스트로 변형하거나 다르게 디자인하는 식으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엽서 속 사진이 구매 시점과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이방인에게 그것은 인지될 수 없다. 이방인이 구매한 각양각색의 조선관광 사진엽서에는 조선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질적인 시간대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엽서는 조선 역사의 상이한 시간대를 뒤섞어 조선에 대한 느낌과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치이기도 했다.
기록과 시선이 교차하는 이미지
우리는 사진엽서에서 과거 조선의 모습을, 또는 불과 100여 년 전 살아 숨 쉬던 조선 사람들을 만난다. 격동과 영욕이 교차하던 시대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인의 관심에서 비롯하여 찍은 사진을 거의 갖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 엽서 속 사진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엽서에 실린 사진은 역사적 기록이자 피사체를 선택하고 표현하는 주체(제작자)의 태도를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은 대상의 정보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사(傳寫)한다는 데 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여러 모습을 망라하는 사진엽서를 보면서 20세기 초 우리 풍속과 복식, 노동 도구 등 급격한 산업화의 와중에 일상에서 사라졌기에 다시 구현하기조차 힘든 한국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다른 한편,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들은 관광 상품이자 서양인과 제국주의 일본인들이 조선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시선이 작용한 결과물이다.
조선을 찾아온 서양인이나 일본인 관광객들은 조선을 피사체로 한 이 사진들에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또한 이 이미지를 만든 사람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100여 년 전 사진엽서에 담긴 조선의 모습은, 보고 싶은 사람과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욕망이 교차하는 그 어디쯤에서 만들어졌다. 낯선 땅, 낯선 문물을 바라보는 호기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을 미개한 사회로 보고 지배와 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사진 속 피사체에 투영된 이미지의 총화이다. 숱한 경성 사진들 속에는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신작로, 일본인이 연 상점이 등장하고 퇴락한 궁궐의 모습도 묘사되지만, 청계천변과 북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조선인 거리와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1900년대에서 1910년대 초에 촬영되었을 각양각색의 조선 사람들과 일상생활의 풍습에서는 인위적인 연출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진의 피사체로 선택된 것은 언제나 배제된 것들과 함께 있고, 선택과 배제에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진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비록 우리의 문화 내면에서 이해하는 사람이 산출하게 될 기록과 통찰을 담고 있진 않다 하더라도 이 사진들은 그 생경함의 시선과 노골적인 의도를 뚫고 반짝이는 편린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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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 사람과 문화 이야기. 조선초기부터 근대까지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탐방기를 담았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형태의 여행기록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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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100년 전 사진엽서로 읽는 조선 –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 전우용,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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