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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근대/대한제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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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유적/건물 |
분야 | 예술·체육/건축 |
요약 경운궁 양이재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 전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한옥으로 1905년 건립하였다.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왕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수학원으로 쓰였다. 이후 대한성공회가 매입하였고, 1930년 7월쯤 지금의 위치로 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축하면서 건물이 다소 변형되었으나 기 본골격과 측면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유지되어 있다.
건립 경위
경운궁 양이재는 1904년 화재로 인해 1906년까지 중건한 경운궁의 중요한 전각의 하나이다. 「경운궁중건배치도」에서 양이재는 함희당과 ‘ㄱ’자 평면의 건물과 함께 수학원(修學院)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역기철(匠役記綴)』에는 함희당과 양이재가 홍원(紅園)의 외당과 내당으로 표기되었고, 그 규모로 외당이 24칸이고 내당이 27칸으로 나와 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함희당이 21칸이고, 양이재가 24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두 기록 간의 차이는 툇간이나 1/4칸을 어떻게 계산하는가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함희당과 양이재는 3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 5월의 『매일신보』에서 이곳은 세자께서 수학하시던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영친왕 이은이 이 건물에서 수학했었다고 추정한다.
변천
1912년 3월의 『순종실록부록』에 "총독부의 요청으로 구 수학원 토지 건물을 영국 교회에 빌려주도록 허락하였다."는 기사가 나오고, 대한성공회가 1919년 8월에 이 건물을 매입하였다.
1920년 5월의 『매일신보』는 "수학원의 건물은 반을 떼어 어떤 서양인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한편에서는 테니스의 운동장을 닦느라고 법석을 하는 모양"이라고 썼다.
“1930년 7월”을 명기한 주교의 상량문이 2008년에 발견되어서, 이 무렵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형태와 특징
『장역기철』에는 "동서 온돌 12칸"이라고 적고 있어서 동서에 각각 6칸을 두었다고 짐작한다. 이건한 뒤에 바닥, 가벽, 지붕, 누각 형태의 기단 등과 같이 내부와 입면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지만, 민흘림기둥을 쓴 2고주 7량가 구조의 기본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경희궁 양이재는 1905년에 건립한 경운궁의 중요한 전각이었다는 점과, 이 건물에서 왕족과 귀족들을 교육했다는 유서가 있다는 점,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를 지금까지 전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6년 9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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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주)삼성건축사사무소 편, 『경이궁 양이재 수리보고서』(서울특별시 중구, 2008)
- ・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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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경운궁 양이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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