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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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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자

다른 표기 언어 金敏子 동의어 김우경(金又璟), 와까구사 도시꼬(若草敏子)
요약 테이블
시대 현대
출생 1914년 9월 9일
사망 2012년 11월 5일
경력 한국무용협회 무용공로상 수상(1966)
유형 인물
직업 무용가
대표작 「봄처녀」
성별
분야 예술·체육/무용

요약 해방 이후 최승희의 제자이며, 예그린악단의 안무가로 활동한 무용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 서울 내수동에서 아버지 김영제(金永濟)와 어머니 유운자(柳雲子) 사이의 1남 4녀 중 셋째 딸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경(又璟), 민자는 예명이다. 14살 때 경기고녀(현 경기여고) 재학 중 하교 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스스로 찾아가 입문하였다. 최승희의 제자가 되어 부모 몰래 춤을 배웠다.

1933년 3월 6일 최승희가 다시 일본으로 떠날 때, 그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동경으로 갔다. 최승희의 딸 안승자(安勝子: 안성희의 아명)를 돌보는 조건으로 유학자금을 보조해 주기로 했는데, 실제로는 식모살이와 같았다고 한다.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연구소에 들어갔으나, 개인적으로 발레를 배우고자 에리아나 바바로바(일본으로 망명한 러시아 발레리나)를 찾아가서 발레수업을 받았다. 1935년 최승희의 부민관 공연 때 김민자는 최승희와 듀엣을 하거나 솔로로 출연했다. 이때 김민자는 최승희가 지어준 와까구사 도시꼬[若草敏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최승희가 해외 공연을 떠나면 김민자는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맡아 조교로서의 역할을 했다.

1938년 12월 20일 경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의 요청으로 히비야 공회당에서 파트너로 공연하였다. 이때 처음 긴 도시꼬[金敏子]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춘향이와 이도령」, 「봄처녀」 등을 공연하였다. 또 둘은 중국의 청진, 상해 등에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후 최승희와도 파트너로 공연하였다.

김민자는 26세에 동갑나기 동북제대(東北帝大) 대학생 김태철(金泰喆)에게 구혼을 받았고, 27세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결혼하였다. 남편은 검찰청 검사가 되었다. 6·25전쟁 때 남편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는데,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자손이 없다.

1940년 9월 첫 개인 공연인 ‘김민자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민자는 최승희가 도쿄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온 한성준을 찾아가서 조선전통춤을 배울 때도 동행했다. 최승희가 한 달여 동안 춤을 배울 때 김민자는 그녀의 수발을 들며 어깨너머로 한성준의 춤을 익혔고, 최승희의 복습과 기억을 돕기도 했다. 이때 한영숙과도 인연을 맺었다.

1961년 창단된 예그린악단의 안무를 담당하여, 1회에서 14회까지 안무지도를 했는데 미국 공연 후 악단이 해체되었다. 1966년 한국무용협회로부터 무용공로상을 받을 때, 제자 주리(朱莉)에게 자신의 대표작 「봄처녀」를 주어 춤추게 했다. 시상 후 1년 동안 앓아눕게 되었는데, 이로써 은퇴하여 서울 종암동 소재 영산법화사에 40여 년을 머물다가 2012년 11월 5일에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6년 한국무용협회 무용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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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거장과의 대화』(이송, 운선, 2004)
  • ・ 「나의 춤 회고: 모든 일은 잊혀도 공연 때의 흥분은 생생하게」(김민자, 『춤』11, 1983)
  • ・ 「新舞踊家 金敏子의 硏究」(박지혜,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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