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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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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제도 |
분야 | 예술·체육/국악 |
요약 왕이 거둥할 때 바라(哱囉) 혹은 나각(螺角)을 불어 군악을 시작한다는 것을 왕의 수레 앞에서 계문(啓聞)하는 일을 하는 선전관.
개설
선전관은 선전관청에 소속되어 국왕의 명에 의하여 군의 지휘통신 기구를 휴대하고 비상숙직에 임하는 전령관인데, 그 중 왕이 거둥할 때 바라(哱囉. 혹은 나각(螺角))를 불어 군악을 시작한다는 것을 왕의 수레 앞에서 취라(吹螺)할 것을 알리는 일을 하는 선전관을 계라 선전관이라고 한다.
내용
선전관은 조선시대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이다. 선전관의 임무 중 형명은 기치류(旗幟類)인 형(形)과 금고류(金鼓類)인 명(名)으로 지휘‧통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조선후기에는 그 의미가 ‘깃발’에 한정되었고, 음악은 ‘계라(啓螺)’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그 기능을 나타내게 되었다. 계라는 왕이 행차할 때 선전관이 수레 앞에서 ‘취라(吹螺)할 것을 아뢴다’는 뜻이다. 취라하는 일은 선전관청에 소속된 내취가 담당했다.
변천과 현황
선전관청은 1458년(세조 3) 선전관을 둠으로써 시작되었고, 영조대 이전에 정무아문(正武衙門)이 되었으며, 1894년(고종 31)에 시종원(侍從院)으로 바뀌었고, 1900년(고종 37)에 우시어청(右侍御廳)으로 계승되었다가 1907년에 폐지되었다. 선전관청 소속의 선전관은 갑오경장(1894-1896)시에 시어(侍御)라는 직(職)으로 변경됨과 동시에 무관이었던 선전관이 문관이 되었다.
선전관청의 기능은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 등인데,이 중 계라는 『대전통편(大典會通)』에 처음 나타나고, 『육전조례(六典條例)』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후기 선전관청이 철파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후기 취고수의 등장으로 내취제도도 새로 정립되었고, 이에 따라 선전관의 기능도 변화되어 계라를 담당하는 선전관이 새로 등장하였다. 계라선전관이 취라(吹螺)하는 일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형명도 ‘깃발’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제한되고,형명의 의미도 변화되었다. 계라선전관의 등장은 조선후기 내취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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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이숙희, 태학사, 2007)
- ・ 「19 세기말의 취고수와 세악수 : 『 내취정례(內吹定例)』 『 취고수군안(吹鼓手軍案)』 의 분석」(우에무라유키오, 『韓國音樂史學報』제20집, 199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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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계라선전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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