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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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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

다른 표기 언어 Gyungreung , 慶陵
요약 테이블
시대 고려후기
건립시기 1308년
성격 능, 왕릉
유형 유적
소재지 개성 서쪽 12리
분야 역사/고려시대사

요약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의 능. 왕릉.

내용

충렬왕은 1308년(충렬왕 34) 7월 기사일에 73세의 나이로 신효사(神孝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빈전은 숙비(淑妃, 숙창원비 김씨)의 저택에 마련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같은 해 10월 정유일에 왕실법도에 따라 장례를 마쳤으며 능호를 경릉(慶陵)이라 하였다.

이때 영구가 처음 떠나자, 충선왕이 직접 거친 베로 만든 상복〔최마질〕을 입고 손수 향로를 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타고 산릉(山陵)에 이르렀다. 장례를 마치자, 크게 곡(哭)을 하고 돌아와서 상복을 벗었는데, 이는 이전에 일찍이 없던 효행이라고 여겼다.

경릉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개경 서쪽 12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삼현리에 있는 묘련사(妙蓮寺)이다. 경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므로 묘제와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고려 당시 경릉에 간수군이 배치되어 능을 지켰으며, 조선 세종 때인 1432년(세종 14)에 경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순조실록』에 1818년(순조 18) 2월 고려 왕릉 중 능주가 확실한 30기에 표석을 세우고 능주를 모르는 왕릉급 능묘에도 번호를 매겼다는 기록과,『고종실록』에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왕비릉 57기의 능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다는 기록을 통해서, 조선 말엽까지 경릉이 지속적으로 관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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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 『동국통감(東國通鑑)』
  • ・ 『경국대전(經國大典)』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 『고려왕릉』(장경희, 예맥, 2008)
  • ・ 『고려고도징』(한재렴, 아세아문화사, 1973)
  • ・ 「고려의 왕릉과 사원과의 관계」(허흥식,『고려시대연구』Ⅰ, 2000)
  • ・ 『朝鮮古墳調査報告』(朝鮮總督府,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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