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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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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1927년 |
성격 | 독립운동단체 |
유형 | 단체 |
해체 | 1929년 10월 |
분야 | 역사/근대사 |
요약 1927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되었던 단체.
연원 및 변천
1920년 청산리대첩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적극적인 무력탄압정책과 독립운동단체의 분열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1926년 7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존립과 각 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안창호(安昌浩)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반대하고 주의·주장을 초월한 일대혁명당(一大革命黨)을 결성한 뒤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가 조직되었고, 국내에서는 1927년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1927년 3월 조직된 상해한인청년회가 유일독립당 결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 홍진(洪震)이 사임하고 재야에서 촉성회 발기운동을 전개하자, 공산계에서도 동조하여 홍남표(洪南杓) 등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4월 10일홍진·홍남표의 이름으로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이 발표되고, 이튿날 창립총회에서 강령을 채택하고 집행위원 홍진·홍남표·이동녕(李東寧) 등 24명이 선출되었다.
그 뒤 공산계·비공산계 양파의 분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북경촉성회로부터 상해에서 각지 촉성회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이 기회에 집행위원을 15명으로 줄이고 연석회의 출석대표로 이동녕·홍진·김두봉(金枓奉)·홍남표·조소앙(趙素昻) 등을 선발, 파견하였다.
9월 30일 예정된 연석회의는 각지 대표의 미도착, 민족·공산의 양분된 주장 등으로 연기되다가, 11월 22일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연합회는 북경(北京)·상해·광둥(廣東)·우창(武昌)·난징(南京) 등지의 5개 촉성회 대표가 참석, 15명의 집행위원과 5명의 상무위원회 구성을 결정하였다. 현지의 이점으로 상해촉성회 회원은 집행위원의 3분의 1, 그리고 상무위원 5명 중 3명을 점하게 되었다.
한편, 사상의 양분으로 공전을 거듭하던 중 1928년 12월 코민테른에서 ‘12월테제’를 결성하면서 민족협동전선의 붕괴로 1929년 10월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좌우합작의 시도였으며, 독립운동통일전선 구축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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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 ・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4(국사편찬위원회, 1968)
- ・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에 대한 일고찰(一考察)」(김희곤, 『한국학보(韓國學報)』 33, 일지사, 1983)
- ・ 「재만항일독립운동단체(在滿抗日獨立運動團體)의 전민족유일당운동(全民族唯一黨運動)」(정원옥, 『백산학보(白山學報)』 19, 1975)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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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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