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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중세가 암흑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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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온난기

고대를 끝내고 중세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흉노라는 민족이었다. 흉노를 역사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기근을 자주 들게 한 한랭건조 기후였다. 곧 기후가 중세를 연 셈인데, 중세 중간에는 온난습윤한 기후가 찾아왔다.

1000년 무렵부터 1300년 무렵까지 300여 년 동안 따뜻한 기후가 계속되었다. 이때를 '중세 온난기'라고 한다. 이 기간에 유럽의 평균 기온은 이전보다 더 따뜻했다. 현재의 기후 역사학자들은 오늘날 기후보다도 더 따뜻했다고 말한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빙하가 현저히 감소해 선사 시대 말기에 개발되었다가 눈에 묻힌 구리 광산이 노출되어 광부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그리고 늘 있었던 유빙이 그린란드 동쪽 바다에서 사라졌다. 따뜻한 날씨 덕에 막혔던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또한 유럽 고산 지역의 수목 한계가 오늘날에 비하여 150미터 더 높았다. 산지의 농사 한계선도 오늘날보다 200미터 더 높았다. 숲을 농지로 활발하게 개간한 탓에 유럽의 숲은 이전 시기의 20퍼센트로 감소했는데, 그 면적이 오늘날보다도 적었다고 한다.

빙하가 녹고 강수량이 많아져 산간 호수가 깊고 넓어지고, 하천 수량이 크게 늘어 강폭이 넓어졌다. 배가 호수 이곳저곳을 연결해 주며 상업 활동을 도왔는데 그때 건설된 하천 다리는 생뚱맞게 오늘날보다 높은 지점에 서 있다. 하지만 영국의 저지대 야산은 불어난 물로 섬이 되어 장기간 고립되었다. 네덜란드 해안 평야 사람들은 해수면이 상승하여 땅이 잠기자 독일로 이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풍차를 설치하는 등 재해 대비력을 키울 수 있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캐나다의 수목 한계는 현재보다 100킬로미터 더 북쪽에 있었고, 지금은 비가 부족하여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아이오와 주의 북서부에서 인디언들이 옥수수를 재배했다. 사하라 사막에서는 넓은 지역에 소가 사육되고 상인이 횡단할 정도로 중간에 많은 우물이 있었다. 당시에 사하라 사막에는 말리라는 제국도 있었다. 제국의 왕인 술탄은 높은 탑이 있는 왕궁과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건설했다. 그러나 15세기에 사막이 건조해지자 유목 민족의 침략을 받아 사라지고 말았다. 어쨌든 이전까지는 사하라 지역이 현재보다 습윤했음을 알 수 있다.

바이킹의 영토 확장

온난기에 유럽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농업 생산량이 늘자 자신에 가득 찬 프랑스와 노르만 십자군 기사들은 제1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러나 온난기 유럽 팽창의 대미는 바이킹이 장식했다.

바이킹은 고향 스칸디나비아를 출발하여 멀리 아이슬란드(874년부터)와 그린란드(999년부터)로 진출했고, 일부는 북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갔다. 특히 본격적인 온난기에 들어선 10세기 무렵은 이른바 '바이킹 시대'라 불릴 만큼 이들의 정복 활동이 활발했다.

바이킹은 처음에는 아일랜드 연안 일대에 정주하면서 켈트인과 융합·동화되어 아일랜드 종족을 형성했다. 이후 아일랜드인과 함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여 마을을 건설했다.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이 이전에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지만, 그들은 정착촌을 건설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얼음의 땅'이어서 사람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유럽인에게 북쪽의 얼음 나라는 세상의 끝이었다. 바이킹은 그런 악조건을 뚫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고 처음으로 나라까지 세웠다. 바이킹들의 모험심이나 진취성에 기후 변화가 더해져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의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린란드에는 '참 사람들'이란 뜻인 이누이트인들이 살고 있었다. 아이슬란드 사람 에리크(바이킹 이주민의 2세)가 바이킹을 이끌고 그린란드에 첫발을 디뎠다. 에리크는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려고 이곳에 '화이트 랜드'가 아니라 '푸른 초원'이라는 뜻인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유인책에 배 35척에 400여 명을 실은 후속 이주단이 들어왔다. 추가 이주민도 속속 들어왔다. 그들은 채소나 건초 등을 재배하면서 주로 목축으로 생활을 해 나갔다. 지금은 불가능한 곡물 농사도 지었고, 본국 아이슬란드에 물개 이빨과 북극곰 모피를 수출하기도 했다.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향하는 바닷길에 일 년 내내 얼음이 발견되지 않아 외부와의 교류도 가능했다.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는 번영했다. 280개의 농장이 있었고, 교회와 수도원도 만들어졌다. 현재는 폐허가 된 그때의 교회 건물이 그 옛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바이킹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인데, 그린란드 바다에서 헤엄을 친 사람도 있었다.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기도 했다. 처음에는 폭풍에 표류하다 우연히 발견한 듯하지만, 나중에는 계획적인 항해를 감행해 아메리카 지역으로 진출했다. 야생 포도가 자라고 있는 그곳은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이었다. 후속 탐험대도 출발하여 인디언과 만났고, 대구를 어획하기도 했다. 인디언의 불친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곧 돌아왔지만,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최초의 유럽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업 혁명, 축복의 시기

중세 온난기에는 일조량이 많아 작물 성장기가 길어졌다. 밀과 보리 등 이전에는 경작이 불가능했던 작물이 새로이 재배되는 곳도 있었다. 그동안 날씨가 추워 포도를 재배하지 않았던 영국에서도 포도를 활발하게 재배하게 되었다. 프랑스 영주들이 영국의 고급 포도주에 심취하자 프랑스 정부가 영국산 포도주 수입을 못하게 할 정도였다. 지금은 잦은 늦서리로 포도 재배가 불가능한 독일 동부에서도 포도가 재배되었다. 심지어 노르웨이 남부에서도 포도가 생산되었다.

산지 높은 곳까지 경작지가 확대되어 양치기 목동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중심 경작 지역이 로마에서 북서유럽으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알프스를 넘어 신천지인 북서유럽으로 향했다. 또한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처럼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농사와 목축이 가능해져 정착지가 만들어졌다.

농사에 유리해진 기후 조건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농업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서유럽의 경우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고 한다. 우선, 호미도 갖지 못한 그곳 농민들은 철제 쟁기를 사용하여 가축으로 땅을 갈았는데, 쟁기를 끄는 소의 멍에가 도입됨으로써 더욱 확산되었다. 쟁기나 멍에 같은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 역사를 크게 향상시켰으니, 생활 과학의 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쟁기는 산림을 농지로 개간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땅을 깊게 파 지력을 회복시켜 생산량을 늘려 주었다. 그리고 로마의 2포제를 3포제로 발전시켜 매년 휴경지를 2분의 1에서 3분의 1로 줄였다. 또한 수력이나 풍력을 이용하여 곡물을 도정함으로써 노동력을 절감했다. 남녀 간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는 물레방앗간이 이때 확산되었다.

특히 수도원은 더 세련된 농경 방식을 도입하여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2세기에 프랑스에서만 1,300개에 달하는 수도원이 새로 생겨났다. 수도원은 철기구를 이용하여 숲을 손쉽게 베어 농지를 확대하고 쟁기를 만들어 농사에 사용했다. 몇몇 수도원은 광대한 땅을 경작하고 수천 마리 양떼를 키우기도 했다. 당연히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족한 일손은 아프리카 사람이나 동유럽 슬라브족(slavs)을 노예로 사냥하여 충당했다. 그래서 영어로 노예를 'slave'라고 한다.

산림이 농경지로 개간됨에 따라 그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먼 산골 깊은 숲 속까지 크고 작은 촌락들이 들어섰다. 자연히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농민들은 잉여 곡물을 시장에 내다 팔았고, 다른 나라로 수출하기도 했다. 재배 곡식의 종류가 다양해져 흉작의 위험도 줄었다. 완두, 콩, 편두 등 콩류 재배로 평민들에게까지 단백질이 충분히 공급되었다. 개간한 산지에는 우유를 공급할 목장이 만들어졌다. 콩과 우유는 영양 만점인 식품이다. 시골의 가난한 자들과 소규모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중세 화가의 그림에 그려져 있는 풍성하게 수확하는 장면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유럽 인구가 두세 배로 증가하여 온난기가 끝날 무렵에는 7,300만 명 이상이 유럽에 거주했다고 한다. 시장이 섰던 자리나 큰 마을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발전했다. 일부 농민들은 아예 농촌을 떠나 강가나 해변에 위치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영주의 지배를 받던 농노들도 도망가 자유를 얻자,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처럼 훗날 대도시로 성장한 도시들은 모두 이때 건설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처음에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자치 도시가 되었다. 도시에 정기적인 시장이 열리자 이른바 '경제 붐'이 일어나 상공업이 발달했다. 상점에서는 구두, 식기, 보석, 자기 등을 판매했다. 물레나 베틀 같은 효율적인 섬유 제조 기술이 도입되고, 수차와 풍차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종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종이 보급은 새로운 지식이 나오고 퍼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상공업자들은 길드를 조직하여 영업을 독점했다.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 등 일부 도시에는 대학이 들어서 학문을 발전시켰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성당

중세 온난기는 활기가 넘치는 '황금 시기'였다. 수백 년간 끊이지 않던 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다소 안정되었고, 교회의 분열 같은 갈등도 없어졌다. 평민이나 농노 납세자가 늘어나 영주나 교회는 세금이나 십일조를 더 많이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축복과 영주의 보살핌 덕분으로 여기고 많은 양의 재물을 바쳤다. 그 수입으로 영주들은 성과 궁전을 증축했고, 교회는 성당을 새로 지어 올렸다. 건축가와 석공 및 목수들의 호황기였다.

땅 위의 모든 자가, 그가 영주든 농노든 좋은 기후와 풍요한 추수의 축복을 함께 누렸다. 그리고 그 축복을 신의 은총이라고 함께 찬미했다. 이 독실한 시대에서는 모든 이의 운명이 주의 손에 달려 있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주의 자비였기 때문에 오르지 신심을 갖는 것만이 더 많은 자비를 얻는 길이라는 것이 당시의 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풍성하게 내려주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노래로, 기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이 치솟은 성당으로 표현되었다.
- 브라이언 페이건,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사람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대형 성당을 지어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하였다. 고딕 성당의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천국을 향한 그들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교회의 내외부 벽면에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를 조각했다. 교회만이 아니라 수도원 건물도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사람들은 주에 대한 사랑으로 무엇이든 아낌없이 바쳤다. 돈과 노동은 물론 석재나 값비싼 자재를 쾌척했다.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성지를 순례하는 행렬도 유행했다. 그런데 이슬람 세력들이 성지를 점령하자 11세기 말부터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은 대표적인 고딕 양식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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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기 축복이 낳은 최대 산물은 무엇보다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이다. 교회는 군주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정치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 및 일상생활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중세인은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유럽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교회 교리는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교황과 황제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황제가 가지고 있는 성직자 임명권을 빼앗으려고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반발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다. 황제는 눈 속에 알프스를 넘어 카노사에 머물고 있는 교황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빈 뒤에야 용서를 받았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한다(1077년). 이로 인해 교황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있었으나 번번이 교황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노센트 3세 교황이 재임한 13세기 무렵에는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이르러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인물을 황위에 올리기도 했다. 이 무렵 로마 교황청 수입은 모든 국왕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에두아르 슈바이거, 「카노사의 하인리히 4세」, 뮌헨 막시밀리아네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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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성직을 매매하는 등 부패를 일삼자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원에서는 청빈, 정결, 복종과 함께 노동, 독서, 기도를 강조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14세기부터는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군주가 등장했고, 교회 분열이 나타나고 교회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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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집필자 소개

전남대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 [연표로 보는 한국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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