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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상을 바꾼
동물

등자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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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수레를 끌면서 더욱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이 되었다. 그런데 수레는 사람을 태우고 짐을 나르는 역할에서 차츰 전쟁터에서 '전차'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수메르인들의 경우 기원전 2500년경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바퀴 네 개의 사륜 전차를 사용했다. 물론 전차가 생각처럼 그렇게 효율적이고 편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도로는 지금처럼 차가 다니기 좋게 정비된 길이 아니었다. 따라서 수레는 장거리 여행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길을 가다 보면 바퀴나 수레 부품이 빠지거나 고장이 나기 쉬웠고, 비가 와서 진창이 되거나 날이 추워 길이 얼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경사면이 급한 길을 오르거나 내릴 때는 말과 수레가 미끄러져서 말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죽거나 다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전차는 그 모습만으로도 위용을 떨치며 적을 압도했다. 당시의 전투는 창이나 칼을 든 보병이 주력이었으므로 말이 끄는 마차가 진영을 이루어 다가오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또 전차에 탄 병사는 일반 보병보다 위쪽에서 공격하므로 전투 시 높은 시야를 확보하고 사방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더 빨리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전차와 기병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다

수메르를 멸망시킨 아카드 제국은 사륜 전차보다 기술적으로 한 단계 앞선 이륜 전차를 개발했다. 이륜 전차는 사륜 전차에 비해 속도도 빠르고 기동성도 뛰어났다. 내구성도 높아져서 거친 길을 오랫동안 다녀도 부서지지 않았다. 아카드의 전차는 두 마리 말이 끌었다. 전차 한 대에 세 명의 군인이 타는데, 창병과 궁병이 섞인 3인 1조의 전차 탑승 방식은 이후 그리스, 인도, 중국까지 퍼져 나갔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히타이트 부족과 이집트 등은 전차를 계속해서 개량하며 전투력을 높였다.

이집트인들은 바퀴 테를 최대한 얇게 하고 전차를 가볍게 개량해서 운전수와 궁수 두 사람만 타게 했다. 채리엇이라 불리는 이집트 전차는 궁사가 사정거리가 긴 활을 쏘면서 도망치는 적을 재빨리 뒤쫓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히타이트의 전차는 세 명이 타기 때문에 튼튼한 대신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히타이트는 방심하고 있는 적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이처럼 전차와 전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술 문명과 과학이 전술을 발전시키고 또한 반대로 전쟁이 그러한 계기를 제공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기원전 9세기부터 6세기 무렵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강력한 제국을 이룬 아시리아의 군대 역시 전차 부대가 주력이었다. 아시리아의 전차는 네 마리 말이 끌 정도로 크고 무거웠으며 병사 네 명을 태울 수 있었다. 아시리아인들은 바퀴 축에 낫이나 창을 달아서 전차에 접근하는 적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들은 또한 최초로 바퀴 테에 구리, 청동을 얇게 판으로 만들어 붙여 바퀴의 내구성을 높였다. 전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아시리아는 기원전 854년 카르카르 전투에서 전차를 무려 1,200대나 동원하기도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전쟁에서 전차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지만, 말 탄 병사 즉, 기병도 활용했다. 그들은 기원전 880년경 최초로 기병을 독립된 부대로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왜냐하면 기원전 9세기까지 메소포타미아에는 기병대가 없었다. 당시 말은 힘이 약하고 덩치가 작아서 지금처럼 허리에 사람을 태우지 못하고 엉덩이에만 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해서 중앙아시아에서는 교배를 통해 덩치 큰 말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점차 품종이 개량되면서 말을 타고 전투에 나서는 것이 가능해졌다.

메소포타미아 북쪽 초원에 살던 스키타이 등 여러 유목 민족들이 말을 타고 아시리아를 습격했기 때문에 아시리아는 이에 대항해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안장이나 등자가 없던 기병대는 고삐만 잡고 말을 조정해야 했으므로 매우 어설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아시리아 군대에서는 기병이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도 은나라에서 최초로 전차를 사용한 뒤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 시대에는 전차를 보편적으로 전투에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차츰 전차가 사라진다. 유목민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차보다는 기병대를 조직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병은 전차보다 기동력이 높고 비용도 적게 드는 이점이 있었다. 마구, 등자 등이 발명된 이후에는 기병의 전술적인 활용도가 전차를 월등히 앞서게 된다.

말을 탄 기사가 봉건제 사회의 시작을 알리다

인간이 말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마구(馬具)도 같이 발달했다. 마구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필요했다. 또 말의 육체적 피로를 덜어 주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마구의 종류는 문화권에 따라,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다양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마구는 안장, 재갈, 등자, 박차 등이다. 그중에서도 등자는 동서양 전쟁사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발명품이다.

등자는 서양 중세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등자란 말을 탄 사람이 발을 얹을 수 있는 도구다. 말하자면 말 탄 사람을 위한 발걸이다. 주로 쇠로 되어 있고 안장에 달려 있어서 한쪽에 하나씩 늘어뜨린다. 별로 대단치 않은 것 같은 이 단순하고, 작은 쇠붙이가 어째서 세계사적인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 보자.

등자를 이용하면 말 위에서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므로 기병의 위력이 배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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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는 무엇에 쓰는가? 우선 말에 올라갈 때 도움이 된다. 말이 높기 때문에 사람이 말 등에 올라타려면 무엇인가를 디뎌야 하므로 등자가 없을 때는 애를 먹었다. '상마석'이라고 하는 돌을 그러한 목적으로 박아 두기도 했지만 등자가 생기면서 별로 필요 없게 되었다. 등자는 이처럼 안장에 오를 때도 편리하지만 그보다는 말에 타고 있을 때 더 쓸모 있었다. 등자에 발을 디디면 말에 탄 사람이 안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자가 생기기 전에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양쪽 무릎에 힘을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등자 덕분에 사람들은 더욱 쉽게 말을 타고 기마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주 뛰어난 기마 민족이었던 흉노의 유물에 등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상식적으로 등자는 말과 관련된 도구이므로 늘상 말을 타는 기마 민족들이 개발하고 많이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등자가 없이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노련하게 말을 달릴 수 있었다. 등자는 오히려 말을 별로 타지 않았고 기마술도 축적되지 않았던 민족들에게 더 고마운 발명품이었다.

등자는 기원전 300년쯤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처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정확하게 그 기원이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 차가 있다. 서양 중세사 전문가로 알려진 진 화이트 주니어는 자신의 책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에서 등자의 기원을 기원전 2세기 말 인도라고 밝혔다. 그는 안장을 얹을 때 말의 배를 둘러 끈을 매는 '뱃대끈'에서 등자가 파생된 것으로 본다. 인도인들은 이것을 가르츠라고 불렀다.

느슨하게 묶은 뱃대끈 뒤에 발을 걸치다가 나중에 아주 작은 등자가 생겨났다. 인도에서 처음 생긴 이 등자는 아주 작아서 엄지발가락만 걸칠 수 있었다. 인도는 더운 나라라 신발을 신지 않고 말을 탔기 때문에 이런 조그만 형태의 등자가 가능했다. 그래서 북쪽 추운 지방까지 전파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살던 사람들도 비슷한 등자를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쿠샨 왕조의 유물들이 그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갈고리 형태의 등자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 갈고리 모양은 발을 걸기에는 좋았지만 말에서 떨어졌을 때 발이 잘 빠지지 않아 기수가 말에 끌려 다닐 위험이 있었다. 더 큰 사고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쓰는 것과 같은 형태의 등자는 5세기 전후 중국에서 쓰기 시작해서 이후 한반도와 일본까지 전파된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8세기 무렵 서유럽에 알려졌다.

일단 등자가 생기자 사람들은 말과 밀착되어 좀더 안정감 있게,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었다. 등자 덕분에 양손으로 고삐를 그러쥐거나 말갈기를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것은 또 한 가지 이점이었다. 등자의 위력은 전쟁터에서 가장 크게 발휘되었다. 기수는 말에 탄 채로 자유롭게 칼을 쓰고, 정확하게 조준해서 활을 쏠 수도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은 그중에서도 창을 선택했다.

보병들도 창을 썼지만 그 위력은 기병의 창에 비하면 미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에 탄 사람이 긴 창을 옆구리에 끼고 기수의 몸무게에 돌진하는 말의 무게까지 실어 적진을 부수고 들어가면 보병으로는 마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중세의 기사들은 이런 식으로 한쪽 손에 방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창을 쥔 채 적들을 섬멸했다. 기사들은 점점 더 긴 창을 선호했고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주로 얼굴이나 가슴을 겨누었다.

기사에게는 전쟁터에서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감도 요구되었으므로,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일정한 수업을 거쳐야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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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상력이 높은 무기가 개발되면 이에 대응하여 방어하는 무기와 장비도 발전하는 법. 등자 덕분에 전쟁의 공격력이 높아지자 기사들은 적의 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꺼운 가죽이나 금속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초기에는 조그만 금속 고리를 무수히 엮은 사슬갑옷을 입었다. 그러나 사슬갑옷 정도로는 돌진하는 장창이나 적이 휘두르는 곤봉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철판을 두른 갑옷이 기사들의 필수품이 된다. 중세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사의 갑옷이다.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얼굴과 목을 보호하기 위해 철제 투구까지 썼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거덕거리는 깡통 로봇 같았다. 완전히 무장을 한 기사들은 그 무게가 엄청 났다. 따라서 기사를 태운 말은 더욱 크고 튼튼해야만 했다. 심지어 말에도 쇠로 된 갑옷과 보호대를 착용했기 때문에 말은 200킬로그램 가까운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중앙아시아인들이 개량한 말보다 더 큰 종을 만들어 군마로 썼다. 따지고 보면 말들이 지금처럼 체격이 커진 것은 중세 시대 기사 계급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사는 이동할 때는 군마를 타지 않았다. 군마는 오로지 전쟁터에서만 사용했다. 값비싼 군마가 짐을 나르거나 긴 여행에 지쳐서 막상 전쟁터에서 제대로 달리지 못하면 큰일이므로, 기사들은 이동할 때 군마 대신 팔프레이라는 승용마를 탔다. 기사는 이걸 타고 다음 전쟁터까지 갔다가 거기서 군마로 갈아탔다.

그 외에도 기사들은 역마라고 불리는 짐 싣는 말을 최소한 한 마리 이상 거느렸다. 전쟁은 대부분 근거리가 아닌 장거리 여행이었으므로 기사가 가지고 가야 할 개인 물품과 장비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최소 한 명 이상의 시종을 거느렸는데, 물론 시종도 자기가 탈 말 한 마리는 데리고 다녔다. 이상은 기사의 최소 단위고, 여기에 궁사와 추가 시종 등을 거느리는 사람은 보다 많은 말이 필요했다.

물론 이렇게 하자면 돈이 많이 든다. 잘 훈련된 군마를 사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왕이나 영주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기사에게 작위와 영지를 주었다. 전쟁 수행 능력과 이에 대한 대가,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바탕으로 중세 기사 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는 중세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인 봉건제의 토대가 된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중세 봉건제 사회

봉건제 사회는 세 개의 계급으로 나뉘었다. 귀족과 기사, 그리고 소작농이다. 그 외 계층으로 성직자와 법률가, 상인 등의 중산층이 있었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다. 중세 인구의 대다수는 소작농이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성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기사를 임명하고 기사는 영주에게 충성을 바친다. 기사의 주된 임무는 영주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기사는 전쟁터에 나가기에 바쁘므로 영주에게 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시간이 없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바로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자유와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기사의 보호를 받았다. 전쟁이 많은 시대였으므로 무력을 가진 자의 그늘에 숨을 수 있는 것은 자유만큼이나 중요했다.

본래 소작농의 개념은 땅 주인에게 일정한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짓는 농부를 가리킨다. 그러나 중세의 소작농은 대부분 농노에 가까웠다. 농노는 신체와 인권이 구속되는 노예와는 거리가 있지만 농노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거의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년 내내 노동을 해도 정작 그들에게 돌아오는 식량은 간신히 배고픔을 면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재산을 늘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신분 상승의 길도 없었다. 영주의 허락 없이는 이사나 결혼도 할 수 없었다.

농부들의 삶은 고되었지만 중세 초기 농업 생산량은 꾸준히 늘었다. 유럽의 기후가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식량 공급이 안정되자 인구도 서서히 늘었다.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데에는 기후 외의 몇 가지 변수가 있다. 땅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작물을 시기별로 경작하는 '삼포제' 덕분에 땅심이 높아진 것도 한 가지 원인이다.

또 하나의 계기는 '무거운 쟁기'의 출현이다. 유럽에서 농사는 따뜻한 남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유럽 남부는 기후가 건조하고 토양이 질척거리지 않는다. 땅을 긁는 형태의 단순한 쟁기만 있으면 쉽게 땅을 갈 수 있었다. 남부의 쟁기는 대개 소에 매어서 썼다. 반면 유럽 북부의 흙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무거워서 긁는 쟁기를 쓸 수 없었다. 북부의 토양에 맞게 개발된 무거운 쟁기를 이용하면 땅을 두껍게 떠서 뒤집을 수 있었다. 이걸 끌려면 훨씬 힘이 좋은 동물이 필요했는데 전쟁에 나갔던 군마가 적합했다.

그러나 말을 쟁기와 연결해서 쓰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때까지 말을 쟁기질에 쓰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말에 씌울 적절한 마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의 목둘레에 칼라를 걸고 끌게 했지만 그러면 말의 성대와 목의 동맥이 눌린다. 그러다 보면 말이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서기 1000년 쯤에 말 목에 두르는 마구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말의 어깨에 두르게 되어 있어서 목을 압박하지 않는다. 그래도 무거운 쟁기를 끄는 데는 한 마리로 부족했다. 적어도 말이 서너 마리는 있어야 했다.

북유럽의 토양은 말의 발굽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부 유럽의 말들은 괜찮았기 때문에 발굽에 따로 무엇을 달 필요가 없었지만 습하고 질척거리는 북유럽의 흙은 달랐다. 말발굽을 무르고 닳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가죽이나 쇠판으로 된 샌달 같은 것을 신겨 주었다. 그러다가 말발굽이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아예 발굽에 직접 징을 박았다. 새로 나온 목둘레를 하고 발굽에 징을 박은 말은 황소보다 훨씬 쟁기질을 잘했다. 땅의 생산량은 높아지고 말이 좋아하는 먹이인 귀리 재배도 늘어났다.

휴경하는 땅에서 자라는 잡풀은 소나 말을 먹이고, 그 땅에 다시 가축의 똥을 거름으로 주었다. 쟁기와 마구 개발은 농사에 말의 힘을 적극 이용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중세 봉건제 사회는 식량 생산을 늘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구도 안정적으로 늘어갔다. 하지만 중세 봉건제는 의외의 곳에서 드러난 취약점으로 인해, 마치 나비효과처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영향으로 결국 무너지게 된다. 아시아에서 전해진 화약과 쥐벼룩, 이 두 가지가 견고한 중세의 성벽을 일격에 허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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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집필자 소개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어린이책 만들었고, 다른 나라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해 왔다. 지금은 출판 기획사 ‘큐리어스’에서 어린이책 편집과 기획을 하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열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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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동물
세상을 바꾼 동물 | 저자임정은 | cp명다른 도서 소개

역사 속에서 동물이 인간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살펴보며 같은 지구를 공유하는 생명으로서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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