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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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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는 새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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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변화는 ‘시대적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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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민에게 다가가기, 관건은 신뢰
개요
‘백골단에서 포돌이, 정치검사에서 국민의 검찰, 권력보위에서 순수 정보기관으로.’
건국 이후 60년을 관통하는 경찰과 검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의 변화상이다. 1980년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에게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거나 폭력을 일삼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나 ‘백골단’ 등은 그 이름만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는 아이를 그치게 했다는 일제치하의 ‘고등계 순사’에 뒤지지 않았다.
2008년 4월 23일. 대검찰청 오픈하우스 행사에 초대된 솜털 보송보송한 보육원 어린이와 소년원생들은 임채진 총장에게 “검찰과 경찰의 차이가 뭐예요”, “비행 청소년을 어떻게 생각해요” 등의 거침없는 질문을 던졌다. 검찰총수를 똑바로 쳐다보는 똘똘한 눈망울에는 더 이상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유당과 유신, 5ㆍ6공화국을 거쳐 문민, 국민, 참여정부 및 이명박 대통령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권은 쉼 없이 교체됐고, 권력기관도 영욕의 부침과 변화를 겪으면서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
검ㆍ경과 국정원은 유신시절을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유신시절에는 술자리 등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300여 명이 경찰ㆍ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끌려가 재판에 넘겨졌다. 분단논리가 지배하던 현실에서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죽산 조봉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태영호 어부들, 신귀영 일가, 오송회와 아람회 사건 등 간첩 누명을 썼다가 뒤늦게 신원(伸寃) 된 사건만 20여 건에 이른다.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영장 없이 잡아다가 자백을 강요하고 폭행하는 것은 물론 물고문ㆍ성고문ㆍ전기고문ㆍ고춧가루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6년 서울대생 권인숙 씨가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했다 경찰관에게 성고문을 당했고,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으며 연세대생 이한열 씨는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같은 해에 발생한 KAL858기 폭파사건은 지금까지도 안기부의 기획조작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수지 김’ 간첩조작 사건은 2008년 3월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게 9억여 원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중앙정보부의 경우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이름 자체에 담겨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킬 필요성에서였지만 어두운 역사를 자인하는 셈이기도 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교수는 “1공화국에서는 경찰, 3∼5공화국은 안기부, 6공화국 이후에는 검찰의 영향력이 커지는 등 권력기관 간에도 역학구도가 계속 변해왔다”고 말했다.
변화는 ‘시대적 요구’
인터넷 보급과 세계화, 문민ㆍ국민ㆍ참여정부 및 이명박 정부 출범, 인권의식 신장, 남북 대치관계의 완화, 과거사 정리를 통한 자기반성 등의 새로운 사회적 환경은 권력기관을 질적인 변화를 겪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기간 햇볕정책으로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권력기관 내에서 대공수사의 비중은 대폭 축소되는 대신 산업스파이ㆍ마약ㆍ외국인범죄ㆍ경제범죄 등이 주요 업무로 부상했고 ‘인권보호’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자리매김했다.
검찰은 2002년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피의자가 물고문 등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밤샘수사를 없애고 변호사의 접견권을 확대하는 등 기존 수사관행을 인권 중심으로 과감히 손질했다. 경찰 또한 심야조사를 금지하고 불구속 수사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화했다. 민주화 운동 탄압의 상징인 남영동 보안분실은 2005년 7월부터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고 그 안에 박종철기념관도 열었다.
국정원 역시 해외 파트와 신안보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고 첨단과학, 자원ㆍ에너지 분야 인력을 대거 보강하는 등 권력 보위를 위한 국내 정치에서 벗어나 정보기관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앞서 검찰은 1999년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으로 특별검사제가 처음 도입되는 ‘수모’를 겪었다. 검찰 수사에 대한 신뢰 상실에서 비롯된 특검은 2008년 초 ‘쌍끌이’로 진행된 이명박 특검과 삼성 비자금 특검에 이르기까지 권력형 비리나 수사기관이 연루된 사건마다 가동되면서 검찰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국정원도 수난을 피해가지 못해 임동원ㆍ신 건 전 원장은 정치인 등 주요 인사 전화번호 1천800여 개에 대해 불법감청을 지시ㆍ묵인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2007년 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승규 전 원장이 일심회 사건과 관련해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는 이유로 당사자들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제기돼 2008년 7월 1천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받은 것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관건은 신뢰
권력기관이 1990년대 들어 홍보활동을 강화한 것은 국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대검찰청에는 2000년부터 1만2천여 명, 국정원에는 1999년부터 무려 16만여 명이 ‘견학’을 다녀갔다. 하지만 이들 기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여전히 이중적이다.
경찰은 1999년 포돌이 캐릭터를 선보이는 등 국민에게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물대포 분사 등 촛불집회 진압 방식과 백골단 방식의 경찰관 기동대 창설을 계기로 ‘과거로의 회귀’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는 사이 2008년 한 해 동안 공무집행 방해죄 입건자가 1만3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시위 현장에서는 ‘매 맞는’ 경찰이 나올 정도로 공권력은 실추됐다.
검찰은 1999년 대검 공안부장실까지 스스로 압수수색하는 등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표적수사나 정치검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국정원 또한 과거사 위원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과거를 반성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대한 개인정보 열람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는 등 과거 행태에 대한 불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권력기관이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어떠한 권력도 정권이 아닌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하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한때 등을 돌렸던 국민이 결국 다시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공권력이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이 각각 내걸고 있는 안정된 사회와 바로 선 법질서의 토대를 확립하는 경찰, 원칙과 정도를 지키고 절제와 품격을 갖춘 신뢰받는 검찰, 최고의 역량을 갖춘 순수 정보기관이 제대로만 구현되면 권위는 저절로 회복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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