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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연감

소모적 역사 탈피, 공존과 상생의 시대

2008년 연감 보러가기 / 자료편 / 대한민국 건국 60년 / 화해협력 지향하는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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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은 전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고착을 알리는 열전을 벌인데 이어 동서 양진영의 충실한 첨병 역할을 수행했던 대결의 시대를 뒤로 하고 화해협력, 평화번영, 상생공영(남)이나 6.15시대 (북)라는 이름으로 화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반도는 1945년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됐지만 곧이어 세계에 드리워진 냉전체제의 그물에 갇혀 1948년 남과 북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뉜 채 체제 대결과 대립에 힘을 소모해야 했다.

1950년부터 3년간의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쪽의 ‘승공통일’과 북쪽의 ‘적화통일’ 구호는 최고 명제가 됐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남북에서 ‘절대선’으로 자리 잡았다. 남북 간 경쟁과적대적 대립은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특히 남한은 미국과 한ㆍ미상호방위조약을, 북한은 당시 소련,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각각 체결함으로써 한반도는 세계적 냉전의 분계선이 됐다. 이를 반영하듯 남북 양측은 서로 상대를 꼭두각시라는 의미의 ‘괴뢰’로 비하했다.

1970년대 남한 외교부의 국회 업무보고가 늘 남북한 수교국 숫자 비교로 시작하고, 남북 외교활동이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군소 국가들과 수교 전쟁을 벌인 것엔 이러한 체제경정이 고스란히 투영됐다. 남북 간 대결과 상대 타도ㆍ말살 분위기는 체육과 문화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종 국제경기 대회에서 남북전은 요즘 한ㆍ일전 이상으로 양측 당국과 주민, 체육인들에게 꼭 이겨야 하는 시합으로 각인됐다. 운동경기 승패가 체제 승패와 동일시됐기 때문이다.

북한이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이에 자극받아 1967년 1월 양지팀이라는 축구팀을 만들고 실업팀에 준하는 월급을 주면서 중앙정보부 내 잔디구장에서 훈련하도록 하는 등 북한축구 ‘타도’에 나서기도 했다. 북한은 남한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 성공을 보고는 힘겹게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다가 그렇잖아도 어려운 경제적 부담의 가중을 자초했다. 북한은 심지어 1994년 삼지연 동계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결국 개최권을 반납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특히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정책은 남한사회의 혼란을 노린 무력 도발로 자주 나타났다.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사건과 1974년 8월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1983년 1월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탄테러, 1983년 12월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1987년 11월 KAL기 폭파사건 등 굵직한 대남 도발은 한반도의 군사적 불안정을 상시화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남북한 주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인 점이 보여주듯, 남북은 상대를 타도하려는 대결 속에서도 공존과 화해의 모색을 1970년대 들어 시작했다. 1972년 적십자 접촉을 시작으로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남북 최고 지도자 사이의 소통을 시작했고 이 접촉은 남북관계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7.4공동성명’을 만들어냈다. 당시 남북 대화는 미ㆍ중관계의 진전 등 국제적 ‘데탕트’ 무드 속에서 떼밀려 이뤄진 것이기에 1974년 박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남북관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국제적 데탕트가 더 무르익은 1980년대 들어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사건에도 불구하고 박철언 안기부장 특별보좌관과 북한의 한시해 UN대사 간 비밀라인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허담 노동당 통일전선비서의 서울 방문과 장세동 안기부장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키고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교환과 최초의 남북 경제회담을 이끌어냈다.

본격적인 남북 간 대화는 1990년대 초부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북한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가 이어지고 믿었던 중국과 소련마저 한국과 수교 하는 상황에서 체제생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수세적 입장에서 남쪽에 대화의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남한은 경제적으로 고속 성장을 거듭해 북한이 더 이상 경쟁 상대가 될 수 없게 되자 대북 태도에서 한결 여유를 갖게 됐다.

남북 양측은 1990년대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8차례의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고 1991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 간 협력을 규범화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남북은 이 합의서에서 공식 국호를 사용함으로써 상대를 ‘괴뢰’라고 부르는 관행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남북 협력은 북한의 핵문제라는 복병을 만나고 김영삼 대통령 때 남북 간 합의 하에 추진됐던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 주석의 돌발적인 사망으로 무산되는 곡절을 겪은 끝에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이 서명한 6.15공동선언은 화해의 바탕 위에 교류와 협력을 본격화하는 시발이 됐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사업 개시 이래 개성공단 사업과 남북 철도ㆍ도로의 연결 사업이 착실하게 진행됐다. 1989∼97년 사회ㆍ문화 분야의 방북 인원이 701명에 그쳤던 것이 2000년 1천150명으로 1천 명을 처음 넘어선 뒤 매년 꾸준히 늘어나 2007년에는 1만2천217명으로 1만 명 방북시대를 열었다.

남북 간 경제협력 사업은 1995년 ㈜대우의 남포공단이 최초 승인을 받은 이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을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1989년 1천900만 달러에 그쳤던 남북 간 교역액은 2007년엔 17억9천700만 달러로 100배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남북관계가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고는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고 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거대한 물줄기 자체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앞으로 남북관계를 위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국제적 냉전과 남북 간 대결시대에 보았던 소모적 역사와 탈냉전과 한반도 화해시대에 찾아낸 상생의 교훈 중 무엇을 택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책 ‘부의 미래’에서 남북관계를 위한 조언을 내놓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예상에서 5년이나 당겨진 독일의 통일과, 점진적 개혁을 벗어나 혁명으로 치달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론하면서 “한국이 속도지상주의의 문화와 경제, 그리고 신중하고 더딘 외교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한국은 물론 북한의 미래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급작스럽게 다가올지 모르는 통일을 위해 지금부터 남북한이 함께 살기 위한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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