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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

2008년 연감 보러가기 / 자료편 / 대한민국 건국 60년 / 세계에 우뚝 선 정보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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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철강, 조선, 정보통신(IT)... 21세기 한국 경제를 지탱해주는 대표적인 산업들이다. 특히 반도체, 휴대전화 등의 IT제품은 일본을 따라잡은 뒤 갈수록 그 격차를 벌리고 있는 대표적인 ‘극일(克日)’ 제품으로 꼽힌다.

자동차 산업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정주영 현대자동차 사장이 일본에서 자동차 엔진을 들여와 ‘포니’라는 국산 자동차를 처음 만들면서 태동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산업 역시 정주영 회장이 영국에서 거북선이 도안된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차관을 얻어낸 신화가 있다. 한국의 철강 산업 성장의 이면에는 박태준 신화가 있다. 포항 앞바다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마치 군사작전 하듯 죽기 아니면 살기로 철강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포스코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한국의 IT산업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정부의 엘리트 관료집단, 특히 전두환 정권시절 사실상 경제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이동전화는 구경조차 어려웠고 유선전화도 전국을 통틀어 284만 회선, 100인당 전화보급률은 8.4대에 불과했다. 전화는 신청 후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귀한 물건이다 보니 1979년 12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자교환기(M10CN)가 도입될 당시 서울 영동전화국 백색전화 1대의 값은 200만 원으로 변두리 5칸짜리 집 한해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처럼 전화 적체가 심각했던 것은 값비싼 외국장비를 들여와 설비를 갖춰야 했던 구조적 원인에 기인한다. 해방당시 남한의 전화는 5만 대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60년에도 10만 대가 채 안됐다. 6.25전쟁 때 파괴된 전화시설의 복구가 급했기 때문에 새로 전화시설을 확장할 여력이 없었다.

이같이 전화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자 1971년에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통해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백색전화란 법 개정 이전에 이미 가설돼 있는 전화로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었던 것이었고 청색전화란 전화가입권외 양도를 금지한 전화였다.

이런 상황에서 체신부 관료가 아닌 김재익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은 전자교환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육성해야 할 산업이 전자산업이라고 봤고 전전자교환기는 ‘전자산업의 꽃’이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 전자기술이 융합된 종합기술이었다. 따라서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하면 일반 전자산업은 저절로 육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국산 전 전자교환기 개발 논의가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전전자교환기의 개발은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240억 원이라는 거액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하면서 급진전을 이뤘다. 1980년대 초는 군 장비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1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도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었으나 김재익 수석의 경제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결과 1986년 최초로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을 설치해 상용서비스를 개시했으며 대도시용인 10만 회선의 TDX-10(1991년)까지 연속 개발ㆍ보급됐고, 1997년 11월 국산 전전자교환기의 시설 수가 1천만 회선을 넘어서면서 전화적체를 해소하고 국민의 정보통신 욕구를 충족시키게 됐다.

김재익 수석의 경제팀은 또 통신서비스의 제공 주체를 정부에서 민간으로 전환하는 제도개혁을 함으로써 경쟁체제를 통해 국내 통신서비스가 획기적 발전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82년 체신부에서 분리해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를 독립시키고, 데이터통신을 전담할 한국데이타통신(주)(현 데이콤)을 설립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에 따라 통신에 대한 정책 및 규제기능과 사업기능이 분리됐으며 특히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만성적인 전화적체 해소와 통화품질 향상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통신산업의 성장잠재력을 주목한 대기업의 관심과 통신서비스 수요의 다양화, 세계적인 통신사업의 경쟁도입 및 규제 완화 추세,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국가의 통신시장 개방요구 등으로 한국의 통신환경은 또 한 차례 급변했다.

정보통신부 전신인 체신부는 1990년 7월 통신사업 전 분야에 걸친 경정도입을 골자로 한 제1차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실시, 제2 이통사업자(신세기통신)를 선정하고 국제전화와 무선호출사업자를 확대했다. 이어 체신부와 1994년 설립된 정보통신부에서 계속된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시내ㆍ시외전화에도 경쟁체제가 도입되고 PCS사업자선정을 통해 이동통신 분야도 복수경쟁체제로 전환됐다.

한국 이동통신의 새로운 역사는 1996년 1월 SK텔레콤이 세계 최초로 CDMA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그 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 후 SK텔레콤은 2000년 10월 CDMA 2000 1X 네트워크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IT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유선이나 무선통신이 아니라 초고속인터넷이다. 1994년 한국통신에 의해 본격 상용화되기 시작한 인터넷 서비스는 PC통신에 이어 1999년 하나로텔레콤이 ADSL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에 한국통신이 가세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고속인터넷 가입가구는 2000년 1월 30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급속한 증가세를 이어가며 2003년 6월 말 국내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 1천100만 가구를 기록하며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또 전국 모든 읍ㆍ면 지역 100%에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제공기반을 조성해 인구 100인당 가입자 수가 17.2명(2001년 말 기준)으로 OECD회원국 중 1위에 올랐다. 최근에는 가입자 수가 1천500만 명을 넘어섰다.

휴대전화 산업 역시 삼성전자가 1988년 최초의 국산 휴대전화 SH-100’을 생산한 이래 2005년 삼성전자 단독으로 1억대 공급을 돌파하는 등 꾸준히 발전해 지금은 한해 동안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휴대전화 중 4분의 1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회사의 제품일 정도로 발전했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제품의 이미지를 고품격화하는데 가장 기여한 제품은 단연 휴대전화라고 할 수 있고 그 이면에는 ‘애니콜 신화’의 주역인 삼성전자 이기태 부회장 등 이 분야에 온 몸을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의 IT산업은 최근 들어 뚜렷한 성장세를 보여주지 못한 채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비록 우리의 독자기술로 4세대(G) 통신기술인 와이브로(휴대인터넷) 기술을 개발해 세계표준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상용화 속도가 더딘 상태다.

하나로텔레콤 김홍식 차장은 “휴대전화를 비롯, 한국의 IT산업은 아직 상대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급성장하는 중국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며 “앞으로 와이브로와 같은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세계표준화하는데 주력해야 새로운 먹을거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 및 인터넷 가입자수
 일반전화가입자수이동전화가입자수초고속인터넷가입자수
(천명)천명 당1)(천명)천명 당1)(천명)천명 당1)
1949412----
19802,70571--
19845,59513830.07--
19856,51716050.12--
199013,276310801.87--
199518,6004121,64136.40--
199921,25045623,443502.902785.96
200021,93246726,816570.103,87082.32
200723,13047743,498897.6714,710303.57

주 : 1) 연앙추계인구로 계산

자료 :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정보통신산업통계연보」,「방송통신위원회, 통계청「장래추계인구(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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