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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綿)ㆍ밀가루ㆍ설탕’. 이 세 가지 흰 것은 한강의 기적을 거쳐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우뚝 선 한국의 산업발전사를 적어 내린 서사시의 프롤로그다. 농업이 국부(國富)의 거의 전부였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의 산업은 이른바 ‘3백(白)산업’을 씨앗으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개벽(開闢)을 시작했다.
1953년 우리나라의 산업은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농림어업이 절반(47.3%)을 차지하고 제조업은 10%에 그쳤지만 건국 60년을 맞은 지금 농림어업은 3%로 줄고 제조업은 3배로 성장해 선진국 구조를 갖췄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복구한 기반은 일본인 소유였던 귀속재산의 불하와 미국의 무상원조였다. 이승만 정부는 생활필수품의 수입대체를 위한 산업정책을 폈고 1950년대는 섬유와 음식료 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이 성장했다.
1959년 7월 신현확 부흥부 장관은 마침내 전후복구가 끝났음을 알리는 ‘부흥백서’를 발간했다. 백서의 머리말에는 “지난해에는 농업과 공업의 생산이 더욱 많아지고 물건 값이 해방 후 처음으로 떨어졌으며…. 생산된 물건이 많이 쌓여 그것을 팔기 위해서 시장을 더욱 넓혀야 하는 문제가 급해졌고…”라고 적었다.
전후 복구기 정부의 수입대체 정책과 미국 원조물자의 배분은 거대 산업자본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1953년 제일제당을 세워 엄청난 부를 쌓으면서 1956년 제일모직을 준공하고 같은 해 흥업은행을 인수해 재계 선두로 나섰다.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일찌감치 나타났다. 정부 정책의 수혜로 급성장한 기업가들이 앞 다퉈 은행주 불하에 참여하면서 은행은 기업의 사금고로 전락했고 일반인과 중소기업은 고리대금에 의존해야 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우리 산업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압축 성장’으로 눈부신 도약을 이뤄낸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발전은 1960년대 고도성장기와 1970년대 중화학공업 추진기로 크게 나뉜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 당시 PVC와 정유, 자동차조립 공업이 신규 공업으로 부상했고 2차 계획(1967~71년)은 철강과 가전(TV, 냉장고, 전자부품), 석유화학(합성수지) 등이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했다.
수출주도형 중화학공업 체제를 갖춘다는 목표로 추진된 3, 4차 계획에 따라 철강과 비철금속공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1년 2.5%에서 1978년 7.1%로 성장했고 중공업의 최종단계인 기계공업(자동차, 조선, 전자)은 10.7%에서 20.3%로 신장했다.
개발경제 체제는 잇따라 ‘기적’을 만들었다. 현대중공업의 정주영 회장은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과 5만분의 1 지도, 영국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소에서 빌린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 도면만 갖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고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선박 진수식을 치르는 ‘이변’을 이어갔다.
‘포니 신화’도 이 때 나왔다. 1973년 7월 12일 상공부는 국내 자동차 4사인 GM코리아와 기아, 현대, 아세아자동차에 “정부는 한국자동차공업 장기 진흥계획을 수립했으니 각사는 고유모델 승용차 공장 건설 계획을 작성해 8월 5일까지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새롭게 독자 모델을 양산, 경쟁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사생결단식의 방법론을 택한 것. 이 정책에 따른 회사는 후발주자였던 현대뿐이었다. 연간 조립생산 실적이 7천대도 안 되는 현대는 포니를 연간 5만 대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서를 3주 만에 제출하고 미쓰비시에 엔진공장 건설을 맡기면서 ‘포니 신화’를 탄생시켰다.
빛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법.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는 개발경제의 교과서라는 업적과 동시에 고도성장을 성취하기 위해 재정투융자와 사회경제적 자원을 일방적, 집중적으로 재벌에 투여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포철 건설에 미국 수출입은행 등이 차관을 거부하자 박 전 대통령은 한ㆍ일 국교정상화로 받은 대일청구권자금의 상당 부분을 쏟아 부었다. 공장건설에 필요한 항만과 도로, 철도 등의 건설도 국가가 부담키로 했다. 대일청구권자금은 농업과 어업에 사용하도록 양해한 것으로 농민과 어민, 독립유공자뿐 아니라 국민적 반발이 거셌지만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그렇게 진행됐다.
1980년대는 환율ㆍ금리ㆍ유가 등 ‘3저 시대’를 만나 전자와 자동차, 철강 등 중공업제품의 수출이 폭발하면서 ‘한강의 기적’은 서울 올림픽과 함께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인 반도체 시대가 열렸다. 해외 반도체업계가 256K D램을 양산하던 1983년, 삼성전자는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삼성전자는 10년 만인 1992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64메가 D램을 개발해 경쟁국을 따돌렸고 지금은 세계 메모리반도체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산업발전은 1986년을 전기로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근간인 기계와 전기, 조선 등 7개 산업지원법이 공업발전법으로 통폐합되면서 진입규제가 대폭 풀어졌다.
‘3저 호황’과 신규 진입이 쉬워지면서 ‘대마불사’라는 헛된 믿음으로 재벌들은 덩치 키우기에 급급했다. 문어발 확장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닥쳐 우리 산업은 가혹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빅딜’에 따라 현대전자와 LG반도체 등이 사라지는 등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밀레니엄에 접어들면서 제조업 비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제조업 안에서도 IT 업종의 비중이 확대되는 변화를 보였다. IT 관련 업종 위주로 설비투자가 이뤄지면서 다른 업종의 설비투자는 부진해졌고, 산업은 고도화됐지만 제조업의 고용효과는 낮아져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면서 ‘잃어버린 10년’ 논란이 제기됐다.
일부 재벌이 해체됐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는 깊어졌다. 2006년 말 기준으로 상위 200대 기업 중 절반(105개)이 제조업에 속해 있는데 이들의 매출액이 제조업 전체 출하 액의 48.5%를 차지할 정도로 과점화 현상이 심각해졌다.
IT를 바탕으로 반짝 효과를 봤지만 한국 경제는 성장엔진이 식어 갔다. 더구나 고유가와 지구온난화 문제는 우리 산업의 또 다른 변모를 요구하고 있다.
제조업의 공동화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역시 우리 산업이 직면한 도전이다. 이재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고령화는 제조업에 가장 큰 충격을 주고 있지만 제조업에서 새로운 노사 문화와 고령취업에 대한 한국적 모델을 만들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등록대수 및 가구당 자가용 보유대수(단위 : 천대, %)
등록대수 | 승용차 | 버스 | 화물차 | 특수차 | |||||
자가용 | 구성비 | 10가구당(대)1) | 자가용 | ||||||
1955 | 18 | … | … | … | 7 | 3 | 3 | 8 | … |
1960 | 31 | … | … | … | 13 | 4 | 4 | 13 | … |
1970 | 127 | 46 | 36.2 | 0.1 | 61 | 29 | 16 | 49 | 1 |
1980 | 528 | 360 | 68.2 | 0.5 | 249 | 179 | 42 | 227 | 9 |
1990 | 3,395 | 3,039 | 89.5 | 2.7 | 2,075 | 1,902 | 384 | 925 | 11 |
2000 | 12,059 | 11,389 | 94.4 | 8.0 | 8,084 | 7,798 | 1,427 | 2,511 | 37 |
2007 | 16,428 | 15,496 | 94.3 | 9.4 | 12,100 | 11,674 | 1,105 | 3,171 | 52 |
주 : 1) 10가구당 보유대수 환산시 2000년이전은 통계청각년도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를, 2007년은 통계청「장래가구추계」를 각각 참조하였음.
자료 : 국토해양부「건설교통통계연보」,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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