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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최강자 대열에 거래시스템

2008년 연감 보러가기 / 자료편 / 대한민국 건국 60년 / 세계 10위로 도약한 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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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싹을 틔운 대한민국 증권시장은 반세기 동안 온갖 풍파를 견디며 급성장, 이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자본시장의 꽃’을 활짝 피웠다. 전쟁의 상흔 속에 온 국민이 의식주 해결을 가장 걱정해야 했던 시절에 개장했지만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과 속전속결의 유목민 기질을 토대로 급성장을 이룬 경제발전에 힘입어 세계 10위권 시장으로 도약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경제 발전사를 보려면 증시 역사를 살피면 된다는 말은 분명 허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증시 역사는 증권거래소가 개설된 1956년 3월부터 비롯된다. 당시 주식 거래는 모두 수(手)작업으로 이뤄졌다. 고객이 증권사 지점에서 주문을 내면 전화로 본점을 거쳐 거래소로 전달되고, 거래소에서는 주문이 들어온 순서대로 계약이 체결된 후 다시 증권사 본ㆍ지점을 경유해 고객에게 계약 체결 정보가 제공됐다.

고객은 주식 매매를 주문한 이후 거래계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1시간 안팎을 기다려야 했고, 종목별 거래 상황은 매매계약이 체결될 때마다 거래소 방송을 통해 공지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지금처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리얼타임)으로 주식을 매매하고 거래결과를 바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거래시스템이 전산화된 1988년 이후부터다.

한국 증시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했지만 개장 초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수작업 거래와 매매체결 시간 지연 등의 허점을 파고든 직원들의 잇따른 부정행위가 증시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시장 종목들의 가격 움직임을 즉시 파악할 수 있고 주문을 성사시키는 일선에 있었던 거래소 직원들이 거래 조작을 통해 거액을 움켜쥐는 사례가 수시로 발생해 투자자들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던 것. 그 결과 기업의 자금조달과 일반인의 재테크 목적으로 출범한 증시가 이런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시장 참여자 수와 거래자금 규모가 작아 주가의 변동성이 너무 심했다는 점이 증시의 구조적 문제를 초래했다. 거래가 조금만 줄어도 주가가 폭락했고, 정부가 증시 부양을 위해 수백억~1천억 원의 자금만 투입해도 증시가 급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증시가 구멍가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상장기업 수는 개장 당시 12개에서 7년이 지난 1963년에 15개로 겨우 3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증시가 약진한 것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에 속도를 내던 1970년대 들어서다.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증시가 괄목할 정도로 도약했지만 기업들의 흥망성쇠가 워낙 빠르게 진행된 탓에 상장 1호 종목들이 장수하지 못하고 모두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상장 1호인 12개 기업은 조흥은행, 저축은행, 상업은행, 흥업은행 등 4개 은행,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경성방직 등 6개 일반기업, 정책적으로 상장된 대한증권거래소, 한국연합증권금융 등이었다. 이들 기업은 외환위기와 공기업 민영화 등을 거치면서 다른 기업에 인수ㆍ합병(M&A)돼 초기 상호를 유지하는 곳은 현재 하나도 없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연간 주식 거래대금을 보면 증시의 발전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100억~200억 원대에 머물던 거래대금은 1970년대에 1조 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민주화와 세계화, 시스템 전산화 등으로 급성장해 지금은 상장기업 수가 유가증권시장 887개, 코스닥시장 1천63개 등 모두 1천950개로 2천 개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거래대금은 하루에만도 7조~8조 원에 달한다.

시기별 상장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도 한국 증시의 특징이다. 증시 초기부터 건설업종과 수출업종이 주류였다는 대목은 한국 경제가 개발과 수출 위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70년대는 개발경제 속에 현대건설, 대림산업, 한일개발 등 건설업종이 국내 산업을 선도했다. 건설업은 비슷한 시기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외화벌이 창구역할까지 했다.

1980년대는 수출업이 주력산업으로 부상하면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유공, 금성사, 기아산업, 대우중공업 등이 각광을 받았다. 1970~80년대를 주름잡으며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이들 기업은 상당수가 과거 명성을 유지하며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으나 일부는 외환위기를 거치는 시기에 회사 간판을 내리는 비운을 겪었다.

1990년 이후에는 기존의 건설, 수출업종이 건재한 가운데 증권, 은행 등의 업종이 성장하며 선진국 산업구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일은행, 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 대신증권, 대우증권, 한신증권, 동서증권 등이 모두 1990년대에 주목받았던 기업들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두산중공업 등 조선ㆍ기계업종이 세계 일류 기업으로 군림하며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증시 역사를 얘기할 때 가장 회자되는 인물들이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증시를 통해 ‘대박’, ‘인생역전’의 꿈을 실현해 수많은 투자자들의 부러움을 산 ‘왕개미’가 그들이다.

‘광화문 곰’ 고성일 씨와 명동 사채시장의 큰 손 ‘백 할머니’(고 백희엽 씨), ‘압구정 미꾸라지’ 윤강로 씨 등이 가장 이름을 날렸다. 주식 투자 방식이 곰처럼 우직해 ‘광화문 곰’으로 불렸던 고성일 씨는 1970~80년대 증권가와 사채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약했다. 평양 대지주의 딸로 6.25전쟁 때 남하한 백 할머니는 1975년 건설주가 급등하자 동아건설을 비롯한 건설주를 대량 매수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건설주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급성장해 백 할머니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선물시장에서 위험을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간다고 해서 ‘압구정 미꾸라지’라는 별칭을 얻었던 윤강로 씨는 1998년부터 개인적으로 선물투자를 하기 시작한 인물로, 종자돈 8천만 원을 1천300억 원으로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증시는 반세기를 지나오면서 이처럼 한국형 ‘투자의 귀재’, ‘투자의 달인’들을 양산했으며 거래시스템 능력 면에서는 과거 우리에게 가르침을 제공했던 일본을 뛰어넘어 이젠 글로벌 최강자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최근에는 급성장하는 중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거래시스템 기술을 전수하면서 동북아 최고의 자본시장으로 발돋움했다.

2007년의 경우 자산운용업체들이 주식투자 등을 통해 벌어들인 평가이익이 46조 원이었으며 해외투자 평가이익만도 20조 원에 달했다. 해외투자 평가이익은 2007년 국내 수출기업들의 전체 무역수지 흑자 14조 원보다 5조 원이나 많은 것이다.

한국 증시는 이제 글로벌 투자은행들과 경쟁하면서 국가 신성장 동력원으로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인력을 양상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하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것이 증권가의 목소리다. 임종록 골든나래개발리츠 대표이사는 “증시가 미국, 유럽처럼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려면 전문 인력 양성이 급하다. 지금은 토지, 건물, 기업 등 모든 자산이 증권화한 형태로 바뀌어 거래되는 추세다. 상품을 증권화하고 증권화한 상품을 관리하려면 고도의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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