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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문화의 질적 성장

2008년 연감 보러가기 / 자료편 / 대한민국 건국 60년 / 격변 겪은 선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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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1960년 3월 대선유세가 한창인 대구의 한 학교운동장. 대낮부터 막걸리가 등장한 유세장 주변은 곳곳이 ‘술잔치’다. 막걸리로 목을 축인 채 소달구지를 타고 돌아가는 사람들 손엔 흰색 고무신 한 켤레씩이 들려 있다.”

장면 #2. “2007년 11월 싸이월드에 개설된 모 대선후보 팬클럽에 가입한 대학생 A 씨. 회원으로 등록하자 도토리(사이버 머니로 100원) 개가 도착했다. A 씨는 혹시나 하며 선관위에 문의한다. 위법이면 도토리 50개를 물어내야 할 판이다.”

‘막걸리 선거에서 UCC(사용자제작 콘텐츠) 선거까지’. 우리의 선거 역사는 격동의 한국정치 60년을 한눈에 들여다보는 만화경이다. 때로는 금권과 관권으로 얼룩져 독재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때로는 민주화와 개혁을 향한 열망의 분출구로, 때로는 21세기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이정표로 작동하며 시대의 굴곡과 주름을 생생히 담아낸 한국 민주주의의 자화상이다.

특히 선거문화는 한국사회의 ‘압축 성장’ 경로를 따라 숨 가쁜 진화를 거듭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쉴 새 없이 연쇄적으로 경험한 한국사회의 발전 흐름 속에서 선거 역시 ‘상전벽해’에 가까운 격변의 과정을 겪어왔다. 근대적 의미의 첫 선거인 1948년 5월 제헌의회 선거는 일명 ‘작대기 선거’(기호 대신 작대기를 이용한데서 연유)였다. 전국 21세 이상 성인남녀가 참정권을 부여받은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지만 문맹률이 80%를 넘고 정치참여 의식은 매우 낮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권력에 의해 참정권이 유리된 대표적 사건으로 여전히 한국 정치의 ‘업보’로 남아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주저 없이 “선거사 자체가 3.15 부정선거 극복의 역사”라고 평할 정도다. 당시 이승만ㆍ이기붕 정권은 공개투표와 개표조작 등 각종 부정선거를 동원해 압승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기에 이른다.

금권ㆍ관권선거는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극에 달한다. 선거전날 뿌려지는 돈과 물품이 당락을 결정짓는 변수가 되면서 1978년 총선 때는 ‘2억 원 쓰면 당선되고 1억 원 쓰면 탈락한다’는 의미의 ‘2당(當)1락(落)’이란 유행어가 등장했다. 통ㆍ반장은 물론 공무원들까지 동원돼 ‘여당 찍어야 발전한다’고 권유하는 관권선거가 기승을 부렸다. 이런 풍토는 민주화가 싹을 틔운 1980년대 후반으로까지 이어진다. 민주화 원년인 1987년 대선에서는 관광버스를 이용한 대중동원이 최고조에 달했다.

1990년대는 ‘미디어 선거’ 시대의 막을 올렸다. TV 등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활용하면서 금권ㆍ관권선거의 폐단을 줄이고 저비용 고효율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미디어의 대중전파력을 악용한 여론조작의 우려가 또 다른 문제점이 됐다. 2000년대 들어선 ‘돈 안 드는 선거’와 ‘인터넷 선거’가 선거문화의 양대 핵심어였다. 특히 2004년 총선은 ‘깨끗한 선거’ 관행을 정착시킨 변곡점이 됐다. `신고포상금 ‘5천만 원’과 ‘50배 과태료 부과’ 제도로 선거판을 풍미했던 ‘돈 선거’ 관행은 된서리를 맞는다.

2002년과 2007년 양대 대선은 한국 정치가 인터넷과 웹 2.0에 ‘접속’한 계기다. 오프라인의 정당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직접 정치의사를 표출하기 시작하면서 온라인이 선거문화의 새로운 공간으로 부상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유권자와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UCC 선거캠페인이 등장했다.

이렇듯 한국 선거의 지난 60년은 ‘기술의 진보’와 ‘정치의 선진화’가 압축적으로 병행된 진화의 과정이다. 막걸리 먹이고 고무신 주던 선거판은 이제 밥 한 끼만 얻어먹어도 50배의 과태료를 물어내야 하는 서릿발 분위기로 탈바꿈했고, 선거의 주 무대는 인원동원이 절대적 승부수였던 유세현장에서 여론과 이미지가 좌우하는 TV와 인터넷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압축 성장에 따른 성장통(痛)이 자못 심각해 보인다. 먼저 현대판 ‘막걸리’의 그늘이 여전히 짙다. 외견상 ‘깨끗한 선거’가 정착된 듯하지만 음지에서 오가는 은밀한 금품거래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서울시의회 뇌물파문처럼 막걸리가 돈다발로 바뀐 사례는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2007년 범여권 대선후보 경선에 등장한 ‘박스떼기’와 ‘버스떼기’는 1980년대 기승을 부린 동원선거의 또 다른 잔영이다. 2004년 정치개혁의 상징적 조치들로 평가돼온 지구당 폐지와 상향식 공천제도도 정당들 간의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슬슬 뒷걸음질치고 있다.

무차별적 흑색선전은 사라졌지만 ‘아니면 말고’식의 인신공격성 네거티브 선거는 2007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선거문화의 새 패러다임으로 꼽히는 인터넷은 유용한 정보와 쓰레기 정보가 뒤섞인 채 검증된 공론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하기에 부족하다.

결국 선거문화가 한 차원 높게 업그레이드되려면 하드웨어적 발전보다도 소프트웨어적 변화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공약으로 승부하는 ‘정책선거’가 착근되지 않는 한 선거문화는 모양만 달리한 금권과 관권선거의 그늘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현 선거시스템의 최대 위협요인인 투표율 문제와도 직결된다. 정책상품을 비교하면서 희망을 찾고 즐거움을 얻는 축제의 장이 조성되지 않고는 기존 정당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투표에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아직은 불안정한 공론장이지만 인터넷은 정책선거가 꽃필 수 있는 효율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차장은 “여론의 확산과 반응이 빠른 인터넷의 순기능을 적극 수용하지 않으면 정당들은 국민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목할 흐름은 뉴타운이나 재개발 등 생활밀접형 이슈가 선거 어젠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점이다. 이는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행태로서 정책선거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의미”(이광재 사무차장)라는 분석이다. 그들만의 정치공학에만 익숙한 여의도 정치권이 갈수록 팽배해지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극복해내기 위한 탈출구로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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