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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을 모질게 버틴 숭례문이 2월 10일 밤의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5시간 만에 잿더미로 주저앉는 모습은 국민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국보1호’라는 수식어가 국가지정문화재의 관리번호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그 상징성은 대단했다. 숭례문이 화마로 문루를 잃고 문화유산계가 경악했지만 돌이켜보면 숭례문 방화사건은 2008년이 ‘조선’과 ‘서울’이 지배하는 한 해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발굴분야에서 서울과 조선의 활약은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만했다.

사실 서울과 조선은 고고학이 주시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현대와 가깝기도 하고, 관련 기록 또한 그 이전인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비해 많은 데다, 각종 고층건물에 지하 문화층은 거의 파괴되고 없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이런 통념을 근본부터 흔들기 시작한 곳은 동대문운동장이었다. 서울시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조성을 추진 중인 옛 동대문운동장을 발굴했더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서울성곽 기저부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는가 하면,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청계천으로 흘러들게 하는 입구에 마련한 수문 중 하나인 아치형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냈다.

경복궁 또한 광화문 원위치 복원 계획과 맞물려 원래의 광화문터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그 결과 조선 태조 혹은 세종시대 경복궁 창건 당시 광화문터와 함께 고종시대 중건 당시 터가 동일한 곳에서 층위를 달리 하며 확인된 것을 비롯해 광화문 좌우 담장 즉, 경복궁 남쪽 담장 또한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서 새롭게 출현한 조선시대 유적의 상당수는 보존과 개발의 논란을 초래했다. 옛 동대문운동장 발굴현장이 이런 논란에 휘말렸으며, 심지어 개발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곳으로 간주되던 원래의 광화문 터 또한 논란 끝에 지하에 창건 당시 기초 흔적을 보존하는 것으로 결정났다.

조선시대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등록문화재인 서울시 청사 문제는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기존 청사는 도서관으로 개조하기로 하고, 그 인접 지점에 신청사를 추진 중인 서울시는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가 기존 청사의 원형 보존을 권고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8월 26일 중장비를 동원해 시청사 부속건물인 태평홀 철거를 강행했다. 이에 맞서 문화재청과 문화재위는 철거 당일 시청사 전체를 사적으로 가지정함으로써 추가 철거를 봉쇄했으며, 이런 대치 상태는 한 달여 간 계속되다가 양 기관이 시청사 원형 보존에 합의함으로써 수습됐다. 이 사건은 권장사항인 등록문화재 제도 자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2008년 문화유산계에 이처럼 조선과 서울이 발휘한 위력이 크기는 했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도 기억할 만한 일은 많았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와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 지목되는 풍납토성은 여전히 새로운 성과물들을 쏟아냈다. 경주에서는 사천왕사지와 분황사지에 대한 연차 발굴조사가 계속돼, 가람 배치 양식을 둘러싼 오랜 의문점들을 풀어주기도 했으며, 안압지 주변에서는 왕궁과 관련되는 막대한 유적과 유물을 쏟아냈다.

풍납토성에서는 8년 만에 발굴조사가 재개된 옛 경당지구에서 한성백제시대의 대규모 우물이 발견됐는가 하면, 그 인근 옛 미래마을지구에서는 대규모 창고 유적이 드러났다. 이 중 경당지구 우물은 한 때 절터가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조사결과 백제토기만 215점을 쏟아냈으며, 미래마을지구 창고에서 발견된 대옹(大甕) 안에서는 중국 청자가 출토되기도 했다. 국립박물관에서는 중앙박물관이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개시 30주년을 맞아 1호분 출토 통나무 목관을 처음으로 공개하고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국립광주박물은 해남 용두리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발굴한 일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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