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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철저한 자기 개혁을 선언하고, 프로테스탄트교도의 공격을 하나하나 규명한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다. 유럽 지역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효과적인 교회 개혁을 이룩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 1545년에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정치적 군사적 사건으로 회의가 중단되기를 거듭했다.
1차 회의에서 가톨릭 신앙의 기초인 신경을 확정하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삼았으며 2번째 회기에서 고해성사를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종부성사를 설명했다.
1562년 다시 열린 회의에서는 성체와 성혈 안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실재로, 실체적으로 현존한다고 정의했으며, 성직·혼인·연옥·대사·성인 공경·성상·성해에 대한 교리를 발표하고 성직자의 윤리 개선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법령을 제정했다.
개요
철저한 자기 개혁을 선언하고,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공격한 교리들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규명한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다.
내적인 분쟁과 외적인 위협이 겹치고, 회기중 2차례에 걸쳐 오랫동안 회의가 중단되었지만 유럽 지역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지도자 마르틴 루터가 파문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전체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교황 수위권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는 것이 두려워 망설였다.
프랑스도 점점 커지는 독일 세력이 두려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를 통해서만 그리스도교의 통일과 효과적인 교회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최초의 몇 가지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그는 트리엔트(이탈리아 북부)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1545년 12월 13일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1기(1545~47)
공의회가 열린 직후 위기감이 커지자 어떤 사람들은 즉각적인 개혁을 요구했고, 다른 사람들은 가톨릭 교리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는데, 절충안이 나와 두 의제를 동시에 다루게 되었다.
가톨릭의 입장을 천명하기 위해 기초작업을 시작하여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가톨릭 신앙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확정했다. 전승을 신앙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고, 라틴어 성서 〈불가타 Vulgate〉가 교리를 증명하기에 적절하다고 선언했다.
성사(聖事)의 수를 7개로 확정하고, 원죄의 본질과 결과를 규명했다. 공의회는 여러 달 동안 열띤 논쟁을 벌인 끝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를 오류로 판정하고, 사람은 하느님이 무상으로 주는 은총과 협력하여 내적으로 의로움을 얻는다고 규정했다(의화). 주교들에게 각기 자기 교구에 머물라고 명령하여 중복된 주교구들을 효과적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들이 생겨 트리엔트 공의회는 장소를 볼로냐로 옮겼고, 의제를 다 처리하지 못한 채 결국 중단되었다(성서).
제2기(1551~52)
군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2번째 회기가 중단되기 전에 대표들은 성체성사에 대한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의 해석에 반대하여 성체와 성혈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을 명시했고, 루터의 해석에 반대하여 실체변화를 명시했다(실체변화). 고해성사를 광범위하게 정의했으며, 종부성사(뒤에는 병자들에게 기름붓는 의식 즉, 병자성사로 바뀜)를 설명했고, 주교의 사법권과 성직자의 징벌권에 대한 법령을 공포했다.
한편 독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공의회가 예전에 결정한 교리들을 다시 심사해줄 것을 요구했고,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했다.
제3기(1562~63)
교황 바오로 4세(1555~59 재위)가 반대하여 열리지 못한 공의회는 교황 비오 4세(1559~65 재위) 때 다시 열렸다.
프랑스 주교가 참석하여 주교들이 자기 교구에만 거주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논쟁이 가라앉았을 때 공의회는 성체성사에서 봉헌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한다고 정의했으며, 평신도들에게 양형 영성체를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를 교황에게 넘겼다. 공의회는 미사를 참된 제사로 규정했고, 성직·혼인·연옥·대사·성인 공경·성상·성해에 대한 교리를 발표했으며, 성직자의 윤리 개선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법령을 제정했다.
1564년 비오 4세는 공의회의 법령들을 승인했으며, 교리 진술들을 요약하여 책으로 발행했다. 징벌에 관한 법령들은 구속력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짧은 회기 동안 트리엔트 교리문답서를 만들었고, 미사 기도서와 일상기도서를 개정했으며, 나중에는 성서 개역본을 발행했다. 16세기말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많은 악습이 사라지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많은 교도를 다시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서방 그리스도교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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