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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세기와 17세기초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내적 갱신을 목표로 추진한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운동.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부흥운동'이라고도 함.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응해 '반종교개혁'이라고 불리지만 누적되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쇄신운동이 본질이었다. 로욜라의 예수회 창설, 테레사의 카르멜 수도회 개혁 운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바오로 3세 교황에 의해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는 반종교개혁이 계속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그 결과 규율의 개혁을 통해 성직자들의 부패를 방지했고 복음 전파에 전념하도록 제도와 조직이 강화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1522~1648년). 반종교개혁은 대체로 16~17세기 초에 있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마르틴 루터가 교회 문에다 95개조의 반박문을 못박기(1517) 직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개혁에 대한 요구는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과 많은 성직자들의 세속적 생활태도 및 정치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의 개혁을 위해 수도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테아티노 수도회, 카푸친 수도회, 우르술라 수녀회, 그리고 특히 예수회 등이 그러한 예이다.
16세기말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과 아빌라의 테레사는 카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고 신비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프랑수아 드 살은 평신도의 경건생활에 이와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중엽까지 프로테스탄트나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의 개혁요구는 계속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3세(1534~49 재위)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도 반종교개혁에 앞장서게 되었다.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도 바로 바오로 3세였다. 1563년까지 가끔씩 열린 이 공의회는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단호히 대처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교리는 믿음과 은총의 역할에 관한 루터의 강조점과 성례전의 수효와 본질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반박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규율의 개혁을 통해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했고, 성직자 후보들에 대한 훈련을 규정하려는 시도도 포함되었다. 가령 성직자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하거나 교회 직무에 성직자의 친척을 임명하는 것, 그리고 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비우는 행위를 제재하는 조치들이 강구되었다. 사목활동과 성례전 집전에 관한 규정도 마련되었다.
1542년 이단과 싸우기 위해 설립된 로마 종교재판소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권력이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더 강한 나라들에 있는 비슷한 기관들보다 성공적으로 교리와 종교관행을 통제했다. 많은 신학자들, 특히 예수회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이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루터와 칼뱅의 진술에 대응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여러 기존 교리를 옹호했으며, 참된 가톨릭 교회의 교의와 신심을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페인의 필립2세도 가톨릭의 개혁을 지지했다.
반종교개혁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통해 로마 가톨릭 세력이 우세한 국가의 식민지에서 지속적으로 선교활동을 펴는 것이었다. 하비에르 및 아시아의 여러 선교사들과 신대륙의 많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전향을 하지는 않았다 해도 세례를 받았다. 또한 과거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했던 지역들, 가령 영국과 스웨덴을 다시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반종교개혁운동의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도와 조직이 강화되었으며, 세속보다는 복음 전파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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