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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3. 4. 17, 뮌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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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1. 9. 27, 바이에른 잉골슈타트 |
국적 | 독일, 바이에른 |
요약 바이에른의 공작(1597~)·선제후(1623~).
30년전쟁(1618~48) 때 로마 가톨릭 진영의 유력한 옹호자였다.
엄격한 예수회 교육을 받았으며 1597년 퇴임한 부친의 뒤를 이어 공작작위를 계승했다. 부채와 취약한 행정으로 허덕이던 바이에른은 정열적인 이 젊은 공작의 활약으로 곧 지불능력을 갖춘 건재한 정부로 회복되었다. 그는 법전을 수정했고 실전에 강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토지와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새로 결성된 프로테스탄트 동맹에 대응하기 위해 1610년 2월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
그는 가톨릭교도였지만 합스부르크가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동맹을 재조직하고 난 다음 1619년에는 오스트리아에 협조했으며 1620년에는 보헤미아인들과 그들의 프로테스탄트 왕 프리드리히(팔라틴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물리쳤다.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팔라틴 선제후 자리와 영토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1622~23년 그가 데리고 있는 군사령관 요한 폰 틸리가 어퍼 팔츠와 라인 팔츠를 정복함으로써 막시밀리안은 선제후 자리에 올랐으며 그의 군대는 그뒤 북부 독일에서 덴마크인들을 몰아냈다(1626).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지휘 아래 독립된 황제군이 생기자 가톨릭 연합세력의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는 위협받았다.
막시밀리안은 강제로 발렌슈타인을 해고하고(1630), 군대를 해산시켰으나 스웨덴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발렌슈타인은 원래의 자리로 복귀했다. 1634년 막시밀리안은 발렌슈타인이 몰락하도록 책략을 꾸몄다. 바이에른은 스웨덴에 넘어갔으나(1632), 뇌르틀링겐 전투로 다시 자유를 찾았으며(1634), 이로써 상당히 안전해진 막시밀리안은 자기 영토를 지키는 데 만족했다.
그는 프랑스와 스웨덴에게 패한 뒤 두 나라와 각각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며(1647),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 따라 선제후 자리와 어퍼 팔츠를 유지하고, 라인 강 유역만 프리드리히 5세의 후계자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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