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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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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7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이스트햄프턴 |
국적 | 미국 |
요약 20세기 미국 작가로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주요 작품은 연작 <여인 시리즈>.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작품을 그렸다. 이후에는 인물의 형태를 포함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관여했고, 나아가 그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후기에는 인물이 추상적인 배경 안에 흡수된 듯한 작품으로 대담한 채색의 풍경화 안에 수직의 인물이 서 있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 말년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생을 마쳤다.
초기 생애와 작품 세계
특히 '액션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구상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렸지만 1945년경에 이르러 이 2가지 경향을 하나로 융합한 것처럼 보인다. 연작 〈여인 Ⅰ~Ⅵ Woman Ⅰ-Ⅵ〉(1952~53)은 그 격렬한 이미지와 충동적이고 정력적인 기법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후기 작품은 풍경화에 점점 더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아버지 렌데르트 데 쿠닝과 어머니 코르넬리아 노벨은 데 쿠닝이 5세 때 이혼하여 그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1916년 상업 미술가와 장식가들이 세운 회사에 견습생으로 들어갔고, 거의 같은 무렵 로테르담 미술 아카데미 야간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8년 동안 창조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예술을 배웠다. 1920년 큰 백화점의 미술 감독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특히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 등 예술의 단순화에 이바지한 피에트 몬드리안과 테오 반 두스뷔르흐 등의 화가들이 이끄는 데 스테일 그룹 등 현대 미술운동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전통적인 스케치 몇 점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926년 미국에 밀입국하여 뉴저지 주 호보컨에 자리를 잡고 주택에 페인트 칠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7년 맨해튼의 한 화실에 들어가 화가이자 미술품 감정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존 그레이엄과 화가인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고르키는 데 쿠닝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928년경부터 파리 유파와 멕시코의 영향을 보여주는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초에는 생물형태와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이런 경향은 그가 평생 그린 모든 작품에 널리 퍼져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은 친구인 그레이엄 및 고르키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았고, 둘 다 생물의 형태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낸 파블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인 후안 미로 등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10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계획에 참여하여 일하기 시작했으나, 1937년 7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업자 구제 계획에서 강제 사직당했다.
이 2년은 대공황 초기 상업적인 작품을 그리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온 이 예술가에게 비로소 모든 시간을 창조적인 작업에만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연방미술계획의 회화부와 벽화부에서 일했는데, 그가 도안한 벽화 가운데 일부는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WPA를 떠난 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장 의약품관의 벽화 디자인을 주문받았다.
이 벽화는 전문적인 벽화가들이 채색했으며,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었다. 1940년 연방정부의 미술부는 그에게 미국 해군 군함인 '프레지던트 잭슨호'의 도서실 벽화제작을 위촉했다. 데 쿠닝이 연방미술계획을 위해 도안한 벽화는 1930년대초에 그가 그린 추상 작품과 비슷한 양식이었으나, 세계박람회장과 연방정부 미술부의 주문을 받고 그린 벽화는 좀더 구상적이었다.
1938년 데 쿠닝은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아 〈서 있는 두 남자 Two Men Standing〉·〈남자 Man〉·〈앉아 있는 인물(고전적인 남자) Seated Figure(Classic Male)〉 등 슬픈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남자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분홍빛 풍경 Pink Landscape〉·〈비가 Elegy〉 같은 서정적인 채색의 추상화도 제작했다. 인물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리는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어, 제목을 붙이지 않은 수많은 추상화와 더불어 구상적이지만 사뭇 기하학적인 〈여자 Woman〉·〈서 있는 남자 Standing Man〉가 제작되었다.
그의 추상화에 표현되는 형태는 갈수록 인물의 형상을 점점 더 강하게 암시했다. 1945년경에 그린 〈분홍빛 천사들 Pink Angels〉에서는 이 2가지 경향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것처럼 보인다. 1946년 그림물감을 살 돈마저 떨어지자 그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검은색과 흰색 에나멜을 이용하여 거대한 추상화 연작을 그렸다. 이 작품들 가운데 〈8월의 빛 Light in August〉·〈검은 금요일 Black Friday〉은 기본적으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요소가 섞여 있는 반면, 〈취리히 Zurich〉·〈우편함 Mailbox〉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요소가 섞여 있다.
첫번째 전시회가 끝난 뒤 이들 작품은 〈애슈빌 Asheville〉·〈다락방 Attic〉·〈발굴 Excavation〉처럼 복잡하고 불안정한 추상화로 발전한다. 다시 색채를 도입한 이들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씨름해온 자유 연상 구성이라는 문제를 정연하고 결단력 있게 요약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1938년 일레인 프리드를 만나 1943년에 결혼했다.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1950년대 중엽에는 그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되었다. 1948년 뉴욕의 찰스 이건 화랑에서 흑백 에나멜 구성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8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마운틴대학에서, 1950~51년에는 예일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데 쿠닝은 1940년대초와 1947~49년에 정기적으로 여인상을 그렸다.
후기 생애와 작품 세계
초기 추상화에 나오는 생물체의 형태는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가 오로지 '여인'의 주제만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여름 그는 〈여인 Ⅰ WomanⅠ〉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많은 변형을 거쳐 1952년에야 겨우 완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른 여인상도 제작했다. 이들 작품은 1953년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전시되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그의 동료들은 추상화만 그리고 있었는 데 반해, 그의 여인상은 구상적이었고, 그림의 기법과 형상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게 칠한 그림물감과 화폭 위에 안료를 쏟아놓은 듯한 기법이 한데 어울려, 현대 남성들에게 내재된 성에 대한 두려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 전성기가 지난 축 늘어진 젖가슴, 공허한 눈, 그리고 말라빠진 손발은 프로이트적 통찰을 가장 우울하게 형상화한 것이었다. 〈여인 Ⅱ Woman Ⅱ〉부터 〈여인 Ⅵ Woman Ⅵ〉까지는 〈여인과 자전거 Woman and Bicycle〉·〈시골의 두 여인 Two Women in the Country〉처럼 모두 이 주제의 변형이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고의적인 천박함은 1950년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가 그린 연작 〈여체 Corps de dame〉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뒤뷔페의 그림도 데 쿠닝의 그림 못지않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흙빛으로 풍부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져 여성의 보편적 상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1955년에는 데 쿠닝도 〈풍경으로서의 여자 Woman as Landscape〉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여성의 상징적인 측면에 눈을 돌린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인물은 추상적인 배경 속에 거의 흡수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뒤이어서 〈경찰 가제트 Police Gazette〉·〈고덤 뉴스 Gotham News〉·〈10번가의 뒤뜰 Backyard On Tenth Street〉·〈로젠버그 공원 Parc Rosenberg〉·〈아바나 교외 Suburb in Havana〉·〈강으로 향한 문 Door to the River〉·〈장미빛 손가락을 가진 루스포인트의 새벽 Rosy-Fingered Dawn at Louse Point〉 같은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들은 구성적이고 다채로운 복잡성에서 대담하게 채색된 단순성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완전히 정착한 1963년경에 데 쿠닝은 다시 여자를 모델로 삼아 〈전원곡 Pastorale〉·〈조개 캐는 사람들 Clam Diggers〉 같은 그림을 그렸고, 이 주제는 그후 몇 년 동안 〈우먼 애커보닉 Woman Acabonic〉·〈모자상 Woman and Child〉·〈방문 The Visit〉 같은 그림에서 다시 탐색되었다.
초기에 그린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그림들은 인습에 구속받지 않는 주제로 화려하고 매끄러운 그림으로 여성 나체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잊혀진 이름 ………Whose Name Was Writ in Water〉·〈무제 Ⅲ Untitled Ⅲ〉 같은 후기 작품들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빛으로 반짝이는 장면을 그린 서정적이고 싱그러운 그림들이다. 후기에는 그림보다 점토소조 작업에 점점 더 열중했다.
한동안 소원하게 지낸 아내이자 뛰어난 화가인 일레인 프리가 1978년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리던 그를 보살펴주어 회복시켰다.
1980년대 그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만년의 작품들은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추상을 보여주지만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 하다는 평판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1987년 〈분홍빛 숙녀 Pink Lady〉(1944)가 360만 달러, 1989년 〈인터체인지 Interchange〉(1955)가 2,060만 달러에 팔리는 등 엄청난 판매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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