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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사림세력은 1582년부터 붕당정치를 전개했다.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로 위축되고 동인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뒤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갔다. 정여립은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했으나 서인의 탄핵을 받고 진안군 죽도로 도망갔다가 자결했다.
서인을 중심으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동인의 주요인물들이 거의 제거되었다. 그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북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 명분이 되었다.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 동안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이가 서인이 되면서 서인이 정파로서의 틀을 잡게 되는 1582년부터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때 정국의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동인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때 이이의 천거로 청현직에 오르기도 했던 동인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갔다. 정여립은 전라도·황해도 일대의 세력들과 결탁하여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하고,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당시 동인 중 조식(曺植)이나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여지던 것인데, 정여립은 선조의 한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모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1589년 10월 황해감사 한준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정철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를 정권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그 아들 옥남은 잡혀와서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정언지·이진길과 평소 정여립과 친분이 깊었던 이발·이길·백유양·이급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고, 이산해(李山海)·정인홍 등 다수의 동인 핵심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특히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인 정개청도 일당으로 지목되었다가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으로 옥사하였다. 그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동인은 서인 처리에 대한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로 이황(李滉) 계열의 사람들이 남인으로,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은 북인으로 나뉘는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 사건은 붕당정치의 운영 방식이 미숙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사림정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만, 이후의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북인의 정인홍 등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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