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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 8. 5,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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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8. 3. 15,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정치인.
호는 인지. 조병옥 박사와의 인연으로 정치를 시작해 1963년 제6대 국회에 민중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한 뒤 10대까지 연속 5선을 기록하며 외곬 야당인의 길을 걸었다.
고흥문은 1941년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직후 사업을 벌여 흥한무역 사장, 동아연탄 부사장, 대동산업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여 황해도당 재정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회의원으로 있는 동안 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최고위원, 국회부의장, 한·일의원연맹 고문 등을 지냈으며 이후 범민족 올림픽 추진중앙협회 고문, 대한민국헌정회 고문, 자유민주민족회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고흥문은 정통 야당의 길을 한번도 벗어나지 않은 '한국 야당사의 증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강행하자 '이땅에 민주정치는 사라졌다'며 골프장에 발을 끊고 다시는 골프채를 잡지 않았을 만큼 강기 있는 것이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당시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경선에 나선 김대중(金大中)·김영삼(金泳三) 후보 간의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결국 당시 유진산 당수와 함께 김영삼을 지지했다.
1980년 신군부의 정치활동 규제로 정계 일선에서 강제로 물러나면서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역할은 없다'는 은퇴의 변을 남기고 제10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났다. 제5공화국 치하에서 신민당 재건에 나선 야당 인사들이 그를 신당 총재로 추대하려 했으나 '통합 야당이라면 몰라도 다당제는 집권세력만 유리하게 할 뿐'이라며 고사했고, 1988년 13대 총선을 전후해 여권이 국무총리 등을 제의했지만 이 역시 '나의 꿈은 야당의 집권'이라며 사양했다. 이와 같이 정치적 고비 때마다 정치권으로부터 숱한 영입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다 거절하고 정계 원로로서의 역할과 집필에 몰두했다.
저서로 정치 수상집 〈정치현장 40년, 못 다 이룬 민주의 꿈〉(1990), 정치 평론집 〈대화의 정치 화합의 정치―민주의 파안을 향하여〉(1997) 등이 있다.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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