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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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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4. 2. 15, 충남 천안
사망 1960. 2. 10
국적 한국

요약 독립운동가·정치가.
일제강점기에 항일의 태도를 견지하며 지낸 후, 해방 후 대통령 특사와 국제연합 한국대표를 지냈다.
1922년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 1923년 대학원을 졸업했고, 1925년 동 대학원에서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연구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와 조전일보사 전무를 지냈다. 1955년 민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이 되어 야당을 이끌었다. 야당지도자 시절 여당과의 협상에서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자세를 견지, 야당내에서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조병옥

가두시위에 나선 조병옥(왼쪽에서 2번째)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공주의 영명학교를 거쳐 1912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연희전문학교, 191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킹스턴 시의 와이오밍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23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1925년 동 대학원에서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연구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시절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19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좌익 교수 배척을 명분으로 사임했다. 이후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이사와 비밀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과 재정총무를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했으며, 1937년 수양동지회(修襄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고, 출감 후 협력을 바라는 일제의 요구를 일체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는 등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일제의 압력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용두리로 내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소개(疏開)생활을 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미군정 경무부장(警務部長)으로 재직하면서 치안유지와 좌익분자 색출에 진력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특사와 국제연합 한국대표 등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구 방위전선에 진두지휘를 담당해 이 지역을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로 장관직을 사임하고, 독재화되어가는 자유당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섰다.

1954년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5년 신익희·장면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의 최고위원, 1956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어 야당을 영도했다. 야당지도자 시절 여당과의 협상에서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草家三間)을 태울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자세를 견지, 야당내에서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신병 치료차 도미(渡美),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수술받고 가료중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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