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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레시 전투 Battle of Crecy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한 전투(1346. 8. 26).|1346년 7월 중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코탕탱 반도에 약 4,000명의 중기병(重騎兵)과 1만여 명의 궁사수(장거리 활잡이)를 상륙시키고 센 강 서쪽의 노르망디 저지대를 약탈하는 한편, 남쪽으로 파리 바로 외곽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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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레시 전투 (관련어 크레시전투) Battle of Crécy, クレシ..
    전역상자 에드워드 전쟁 크레시 전투는 1346년 8월 26일 북부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 남쪽에 위치한 크레시앙퐁티외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백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혼합을 통하여 기사도의 시대를 끝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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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ttle of Crécy 크레시 전투, クレシーの戦い
    The Battle of Crécy, also called Battle of Cressy, was an important English victory during the Edwardian phase of the Hundred Years' War. Coupled with the later battles of Poitiers (also fought during the Edwardian phase) and Agincourt, it formed the first of three decisive English successes dur...
  • 크레시전투 발발
    수적으로 월등한 프랑스 기사들을 물리쳤다. 잉글랜드군에게 무작정 돌격하던 프랑스 기사들은 갑옷을 뚫어 버리는 장궁의 위력 앞에 참패하고 말았다. 크레시전투는 기사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렸다. 장궁과 석궁 등 신무기가 등장하고 새로운 전술들이 개발되자 평민으로 이뤄진 군대도 기사들에게 얼마든지 맞설 수...
    시대 :
    1346년
    국가/대륙 :
    유럽
  •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Poitiers
    남쪽 누엘레 근처 모페르튀 강 나루터 일대에 은신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곳은 미오송 강과 클랭 강의 합류지점으로 주변에 덤불과 늪지가 펼쳐져 있었다. 크레시 전투(1346)의 교훈을 망각하고 프랑스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수렁에 빠져 꼼짝 못함으로써 흑세자군 궁수들의 손쉬운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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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듀플린무어 전투 Battle of Dupplin Moor
    공격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거느린 군대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독특한 전술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 전술은 나중에 핼리던힐 전투(1333)와 크레시 전투(1346)에서 에드워드 3세가 본떠 쓰기도 했다. 베일리얼은 무장한 병사 대부분을 말에서 내리게 했고 대열의 양 측면에 궁수들을 배치해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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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전쟁 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와 장 2세(1350~64 재위)는 계속 방어만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잉글랜드가 프랑스 지방을 점령하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칼레 시를 포위공격해 이듬해 점령했다.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에드워드 흑세자는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프랑스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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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Poitiers, ポワティエの戦い
    프랑스 사이에서 백년 전쟁 중 벌어진 전투이다. 백년전쟁의 1,2기를 거쳐 3차례 영국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겨준 전투 중 두 번째 것이다. 3번의 전투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이다. 1356년 8월 8일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는 대규모 기병 약탈전(chevauchée)을 영국령 아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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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쟁쿠르 전투 Battle of Agincourt, アジャンクールの戦い
    때문에 그들은 백병전에 유리한 많은 중무장 부대가 있었으므로 더욱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인내심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지 못한 또다른 이유는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와 같은 이전 전투에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크나큰 패배를 당했기에, 프랑스 귀족들이 그 보복을 하길 원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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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대륙의 지배를 꿈꾸는 에드워드 3세
    의해 책임있게 훈련된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장궁부대의 활약이었다. 이런 잉글랜드군의 장궁부대 활약은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확실하게 보여진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이듬해 잉글랜드군은 칸을...
  • 영토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백 년 전쟁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신무기인 큰 활을 가진 보병대(장궁대라고 불림)로 맞선 영국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칼레로 진격하여, 칼레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1347년에 그곳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페스트...
    발생 :
    1340년
    종결 :
    1453년
  • 잔 다르크
    차례 휴전이 있었고 어떤 때는 20년 동안이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도 했지만 전쟁의 주도권은 영국이 쥐고 있었다. 학자들은 크레시 전투(1346년), 프와티에 전투(1356년), 아쟁쿠르 전투(1415년)에서 적어도 프랑스 군인 1만 6,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기사였다. 더구나 1420년에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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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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