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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598년 류리크 왕조의 몰락 후 뒤따른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기.
1613년 모스크바에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후에야 끝이 났다.
이 시기에 외국의 침략, 농민 봉기가 극심했으며 왕위를 노리는 자들이 왕위를 겨루며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 남부와 중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사회적·경제적 파탄을 겪기도 했다.
혼란시대 이전에 일련의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 국가의 안정을 해쳤다. 1598년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가계 출신인 표도르가 죽자 표도르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왕위를 이었다.
보리스는 심한 기근난(1601~03)과 보야르(대귀족)의 저항에 직면했으며 폴란드의 지지를 받은 이른바 '가짜 드미트리'의 왕위계승 위협에 시달렸다.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작고한 차르의 의붓형제인 드미트리(진짜 드미트리는 1591년 죽음)이며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보리스는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가 죽자(1605. 4)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드미트리를 차르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새 차르인 드미트리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살해한(1606. 5) 후 대신 실세 귀족인 바실리 슈이스키를 즉위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혼란시대가 시작되었다. 슈이스키는 부유한 상인과 귀족의 지지를 받았으나 잇따른 반란으로 권좌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부와 동부 지방에서 농노출신인 이반 이사예비치 볼로트니코프가 이끈 농민봉기는 가장 중요한 반란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2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비롯한 다수의 왕위 요구자들이 다시 나타나 이들과 싸워야 했다.
제2의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와 소지주·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의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1606년 암살을 간신히 피했으며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미망인이 자신을 남편으로 인정했음을 주장하며 투시노에 진을 치고(1608) 2년 동안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한편 드미트리의 주력 부대가 러시아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슈이스키는 당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웨덴의 원조를 얻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스웨덴 용병이 러시아에 도착하자 드미트리는 투시노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모스크바로 돌아가거나 일부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에 합류했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간섭을 빌미로 모스크바에 선전포고를 한 후 1609년 9월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에 침입, 슈이스키의 군대를 무찔렀다(1610).
무력한 슈이스키에 실망한 모스크바인들은 그를 폐위하고 보수적인 귀족들은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드미트리의 통치 가능성을 우려, 폴란드 왕 지그문트와 투시노에 있던 귀족들간에 이미 체결한 협정을 받아들여 지그문트의 아들 부아디수아프를 새 차르에 지명하고 폴란드 군대의 모스크바 입성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때 가짜 드미트리 중 2번째 드미트리가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지그문트 국왕도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다(1610 가을). 즉 러시아에 대한 직접 통치와 러시아 내 폴란드 군대의 계속 주둔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러시아인들은 침략자에 대항해 단결하게 되었다. 최초의 저항은 대주교 헤르모겐이 선동하고 프로코피 페트로비치 리야푸노프가 이끄는 소지주들과 일부 카자크인들이 합세한 동맹이었으나 이 동맹은 얼마 가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1611년 10월 지주·상인·카자크인 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독립운동이 탄생했다.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포즈하르스키 왕자가 군대를 이끌었고 상인 쿠즈마 미닌은 재정을 조달했다. 이 군대는 모스크바로 진격했고 폴란드 증원부대의 위협을 받았으나 폴란드 주둔군을 무찔렀다(1612. 10). 이듬해 전국적인 대표모임이 소집되어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 이후 3세기 동안 러시아를 다스릴 로마노프 왕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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