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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4. 2. 1, 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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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9. 7. 15, 빈 근교 로다운 |
국적 | 오스트리아 |
요약 오스트리아의 시인·극작가·수필가.
서정시와 희곡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공동작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은행 중역의 외아들이었던 호프만스탈은 빈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6세에 로리스라는 가명으로 그의 첫번째 시들을 출간했는데, 이것들은 그 서정적 아름다움과 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마술적 언어, 꿈과 같은 정취로 빈과 독일에 파문을 던졌다. 젊은 시인으로서 그와 같은 성숙한 경험과 형식상의 노련함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군복무를 마친 후, 학문분야로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로망스어 언어학을 공부했으나 1901년 결혼한 뒤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1891~99년 호프만스탈은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정적(靜的)인 드라마, 영국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극적인 독백, 프랑스의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의 '극속담'(proverbes dramatiques)의 영향을 받은 다수의 짧은 운문 희곡들을 발표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어제 Gestern〉(1891)·〈티치안의 죽음 Der tod des Tizian〉(1892)·〈바보와 죽음 Der Tor und der Tod〉(1893)·〈세계의 소극 Das kleine Welttheater〉(1897)·〈흰 부채 Der Weisse Fächer〉(1898)·〈창가의 여인 Die Frau im Fenster〉(1898)·〈모험가와 여가수 Der Abenteurer und die sängerin〉(1899)·〈조바이데의 결혼식 Die Hochzeit der Sobeide〉(1899) 등이 있다.
그의 시들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희곡들은 인간본질의 가상과 실재, 무상함과 영원함, 지속과 변화를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들은 또한 그의 이후 작품들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세기 전환기 이후에 호프만스탈은 그의 수필 〈서한 Ein Brief〉(1902)에서 순수한 서정적 형식들을 포기했다. 이 수필은 개인적 곤경을 드러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바, 세기말의 심미적 상징주의 운동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의 징후로 여겨지게 되었다.
방향 재설정과 변화기 동안에 호프만스탈은 엘리자베스 시대와 고전시대의 비극형식들을 실험하면서, 토머스 오트웨이의 〈보존된 베니스 Venice Preserv'd〉(1682)를 〈구원된 베니스 Das gerettete Venedig〉(1904)로 각색했고, 이후 슈트라우스가 곡을 붙인 〈엘렉트라 Elektra〉(1903)를 썼다.
동시에 그는 소설 〈안드레아스 Andreas〉(1932)를 쓰기 시작했지만, 이것은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극을 통해 그의 작품이 점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는 슈트라우스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오페라 대본을 썼는데,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1911 상연)·〈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1912)·〈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1919)·〈이집트의 헬레나 Dieägyptische Helena〉(1928)·〈아라벨라 Arabella〉(193 상연) 등이 그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출가이며 디자이너인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을 창설했고, 거기에서 그의 작품 〈누구라도 Jedermann〉(1911)와 〈잘츠부르크 대(大)세계극 Das Salzburger grosse Welttheater〉(1922)을 정기적으로 공연했다. 그의 희극 〈크리스티나의 귀향여행 Cristinas Heimreise〉(1910)·〈까다로운 남자 Der Schwierige〉(1921)·〈청렴한 남자 Der Unbestechliche〉(1923 공연, 1956 출판) 등은 빈 방언으로 씌어졌고, 당대의 오스트리아 사회를 배경으로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문체상으로는 사실주의와 은폐된 상징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문명의 위기와 분열에 대한 호프만스탈의 성찰은 그의 정치극 〈탑 Der Turm〉(1925) 및 서양 문명의 미래를 예언하는 몇몇 수필에 잘 나타나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에 대한 그의 반응은 자신이 오스트리아 혈통임을 더욱 명백히함과 동시에 유럽 전통에 의탁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술은 발전을 거듭했고 초기작품들을 특징짓는 섬세한 우아함과 초월적인 미적 감각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자신은 20세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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