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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고종 27), 충남 청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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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 |
국적 | 한말, 한국 |
요약 한말의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초(聖初), 호는 송촌(松村). 본명은 우석(禹錫). 아버지는 성교(省敎)이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홍주의진(洪州義陣)에 참여했다. 그해 5월 홍주성 함락에 공을 세우고 의병초모장이 되어 활약했으나 홍주의진이 일본군에 패하자 정산·공주 등지에서 소규모 항전을 계속하다가 친일파 직산군수를 살해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1911년 귀국하여 다음해 이기상(李起商)·유장렬(柳障烈)·최국일(崔國一) 등과 함께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가입했으나 임병찬이 체포되자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1913년 귀국하여 채기중(蔡基中)·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했다. 1915년 박상진·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 등과 함께 광복단을 군대식 조직인 광복회로 개편하고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추대하여 국내·국외의 활동을 분리·수행하기로 했다. 그후 김상옥·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가 친일파를 사살하고 오성(烏城) 일본 헌병분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나 배반자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박상진 이하 80여 명의 단원이 잡히자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12월 상하이[上海]로 가 이동휘(李東輝)·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 무기를 얻은 후 국내로 들어와 김상옥 등이 조직한 암살단(暗殺團)과 제휴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총독을 암살하고 일본 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으나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다.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의병활동, 친일파 처단 사실이 발각되어 형량이 23년으로 늘어났다. 신의주형무소에서 27일 동안 단식을 하는 등 옥중투쟁을 계속하다가 19년 6개월 만에 형집행중지로 출소했다. 8·15해방 후 광복단을 재건했으며 6·25전쟁중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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