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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북서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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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669,384명 (2020년 추계) |
면적 | 160.59㎢ |
대륙 | 유럽 |
국가 | 이탈리아 |
요약
팔레르모는 831년 아랍인이 점령한 뒤 북아프리카와의 무역중심지로 번창했다. 황금기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노르만족 시대였다. 노르만족 통치권이 1194년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로 넘어간 후 쇠퇴하여 1266년 프랑스 앙주의 샤를에게 정복당했다. 앙주인들의 압제는 1281년 민중반란으로 끝을 맺었고, 이후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412년 이후 시칠리아 왕국이 아라곤 왕국과 합쳐지면서 이 도시도 번영을 누렸다. 이후 사보이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다가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었다.
1948년 시칠리아가 지방자치를 보장받으면서 팔레르모는 다시 중심도시가 되었다. 항구에서 튀니지 및 나폴리 행 화물·여객 선박업무와 외국 무역을 취급하고 있으며, 감귤류·곡물·생선·화학제품이 주요수출품이다.
BC 8세기에 페니키아 무역상들이 건설했고, 그 이후 카르타고인의 거주지였다가 BC 254년 로마인에게 점령당했다. 로마의 지배하에 기운이 쇠퇴했으나 535년 비잔틴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족에게서 되찾은 다음 다시 번영을 누렸다.
831년 아랍인이 점령한 뒤 북아프리카와의 활발한 무역 중심지로 번창했다. 그러나 팔레르모의 황금기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 있었던 노르만족 시대(1072~1194)이다.
대표할 만한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은 1185년에 지은 대성당이다. 팔라초 레알레(왕궁), 산토조반니델리에레미티 교회(1132), 마르토라나 교회(1143), 그리고 쿠바 궁과 치사 궁 같은 팔레르모 시 주변의 궁전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시칠리아에 대한 노르만족 통치권은 1194년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왕가로 넘어갔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제국의 중심지를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로 옮겼고, 팔레르모에 있는 그의 궁정이 가진 문화적 찬란함은 서부 유럽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이 도시는 호엔슈타우펜 계승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하여 1266년 프랑스 앙주의 샤를에게 정복당했다. 앙주인들의 압제는 1281년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불리는 민중반란으로 끝을 맺었고, 팔레르모는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412년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훗날 스페인이 된 아라곤 왕국와 합쳐지고 팔레르모도 새로운 번영을 누렸다. 16~17세기에 스페인 총독들이 도시의 재건을 위해 애썼으나 도시 빈민들의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스페인 계승전쟁(1701~14)이 끝나고, 사보이 가문의 비토리오 아마데우스 2세가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1718년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영토의 재편기간에 시칠리아-나폴리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에게 할당되었다. 1820, 1848년에 나폴리에서는 부르봉 가문의 통치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1860년 가리발디가 이 도시를 해방시켰다. 팔레르모는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어 번영을 되찾았다.
1943년 7월 연합군의 심한 폭격을 받았고, 시칠리아가 1948년 이탈리아 공화국 안에서의 지방자치를 보장받으면서 팔레르모는 다시 섬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화학품 제조업과 인쇄업 같은 새로운 산업이 발전했으나 도시 곳곳에 빈곤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항구에서 튀니지 및 나폴리 행 화물·여객 선박업무와 외국 무역을 취급하고 있다. 감귤류·곡물·생선·화학제품이 주요수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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