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946년 10월 9일 이범석(李範奭)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운동단체.
약칭 '족청'(族靑)이라고 한다. 이 청년단은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하여 새나라의 역군으로 청년들을 양성한다는 목적하에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결성에 참여한 인사는 단장에 이범석, 부단장에 안호상, 전국위원에 김관식·김활란·이철원·현상윤 외 33명, 상무이사에 설인 외 4명, 그리고 이사에는 백낙준·최규동 외 10명 등이다.
청년단이 내세운 단시(團是)는 첫째,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 둘째,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할 것, 셋째, 현실을 직시하고 원대한 곳을 바라보며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 등 3가지이다.
1946년 11월 미군정 당국의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수원에 훈련소를 개설하고 훈련생을 선발해 이들을 훈련시킨 후, 수료생들을 출신 및 거주 지역으로 파견하여 하부조직을 결성·강화해 나감으로써 전국적으로 막강한 조직을 창출했다. 이러한 조직방법으로 단기간 내에 조직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어 창립 당시에는 300명에 불과하던 것이, 9개월 후에는 20만 명, 2년 후에는 무려 120만 명의 단원을 거느리는 대조직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조직이 확대되자 정계와 사회 일부에서는 족청의 활동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 역시 족청의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우려해 1948년 12월 19일 통합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도록 한 후 족청을 이에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처음에는 이승만의 이와 같은 지시를 거절했으나, 끝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족청을 해체시키기로 결단했다. 그리하여 족청은 창단 2년 여 만인 1949년 1월 15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족청 세력은 해체 이후에도 계속 그 결속력을 유지해 자유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953년 9월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에 관한 담화 발표와 그 후속조치로 취해진 본격적인 탄압에 따라 그 세가 현격히 위축되어 끝내는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범석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