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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 17세기 러시아에서 차르나 최고권력기관의 요청에 따라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개최된 자문회의.
대개 교회나 수도원, 보야르 의회, 토지소유계층, 도시의 자유민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각 그룹의 대표선거와 회의는 독자적으로 개최되었다.
젬스키 소보르는 뇌제 이반 4세에 의해 처음으로 소집되어 그의 통치기에 여러 차례 열렸으며, 폴란드와 대결한 리보니아 전쟁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1566년에 열린 회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1584년 표도르 1세의 등극을 비준한 후로는 1598년 보리스 고두노프를 차르로 선출할 때까지 소집되지 않았다. 혼란시대(1598~1613)에 다시 자주 열렸으며, 매우 영향력있는 기관으로 부상했다. 1613년에 열린 회의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계속해서 열린 몇 차례의 회의는 내정개혁에 일익을 담당했으나, 1622년 이후로는 중요성이 줄어들어 1653년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19세기에 슬라브주의자들은 젬스키 소보르가 차르와 러시아 국민들 사이의 이상적인 통합을 나타내준다고 보았으며, 이 개념을 되살려 젬스키 소보르를 다시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제안의 결과는 N. P. 이그나티에프가 각료직에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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