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53년 6월 15일 |
---|---|
직업 | 정치인 |
국가 | 중국 |
요약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은 2012년 당 총서기 및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고, 2013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하여 당, 정, 군 3대 권력을 장악했으며, 관료 부패에 엄격한 개혁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1969년 문화대혁명 때 산시 성의 시골로 내려가 농업공동체에서 6년 동안 육체노동을 한 이후 어렵게 정식 당원이 되어 지방 정부에서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당 원로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보수와 진보의 지지를 모두 받아서,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데 이어, 2008년 국가 부주석, 2012년 주석이 되었고, 2017년에는 마오쩌둥에 이어 '시진핑 사상'을 생전에 당헌에 넣은 두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2018년 3월 11일에는 '시진핑 사상'을 국가 지도이념으로 헌법 서문에 포함하고 국가 주석의 연임 제한을 삭제한 5차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시진핑 장기집권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같은 해 3월 17일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재선출되었고, 2023년 3월 10일의 전인대에서 국가주석과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되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3연임을 기록했다.
초기 생애
시진핑은 한때 중국의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9년 문화대혁명 때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교육 받은 도시 청년이었던 어린 시진핑은 산시 성(陝西省)의 시골로 보내졌다. 그 곳의 농업 공동체에서 시진핑은 6년 동안 육체 노동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지역 소작농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CCP)에서 계급이 올라갈 때 명문가 출신의 시진핑이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4년에 시진핑은 정식 당원이 되어 당 지부의 서기를 지냈다. 다음 해에는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교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관계 진출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을 겸직한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3년 동안 일했다. 1982년에 비서직을 그만둔 시진핑은 대신 허베이 성(河北省) 중국공산당의 부서기직을 선택했다. 1985년까지 그곳에서 일을 한 시진핑은 푸젠 성[福建省]의 항구 도시 샤먼(廈門)의 당위원회의 위원이자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시진핑은 푸젠 성에 사는 동안 유명 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과 1987년에 결혼했다. 시진핑은 1989년 톈안먼 사건 당시 정부의 대응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후 당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995년에 지역 당부서기 직에 올랐다.
그는 1999년에는 푸젠 성의 대리 지사가 되었고 다음 해 지사가 되었다. 푸젠 성의 수장으로서 시진핑이 관심을 가진 것은 환경 보존과 더불어 인근 타이완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부서기장과 지사 직을 2002년까지 지속하다가 다시 한 번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 그 해 시진핑은 저장 성(浙江 省)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지사 대리를 지내다 2003년부터 당서기가 되었다. 저장 성에 있는 동안 환경 친화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시진핑은 지역산업기반시설 재건에 집중했다.
공산당 상무위원 선출
시진핑의 행운은 상하이(上海)의 고위직을 둘러싼 추문으로 인해 시진핑이 상하이의 당서 기직을 이어받게 되었던 2007년 초에 또 다른 힘을 발휘했다. 그 직책을 맡았던 전임자는 광범위한 연금 제도 때문에 오점을 남긴 사람 가운데 1명이었다. 개혁 성향을 지녔던 아버지와 달리 시진핑은 신중함과 당의 정책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상하이의 당서기로서 도시의 재정적 안정과 재건을 정확히 홍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대표하는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1명으로 선출됨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만 상하이의 당서기에 머물렀다.
중국 최고 지도자로 부상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胡錦濤) 당서기의 후임자가 되었다. 시진핑의 지위는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부주석이 된 시진핑은 환경 보존 노력과 국제 관계 신장에 힘을 쏟았다. 2010년 10월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최종 승계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강화했다. 2012년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다.
'시진핑 사상', 국가 지도 이념으로 격상
이듬해인 2013년 3월 14일 그는 임기 10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되었다. 2017년 10월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9기 전국대표회의에서 '시진핑 새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반영된 당장(당헌) 수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그는 덩샤오핑에 이어 자신의 지도 이념을 당의 지도 이념에 반영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지도사상을 당장에 넣은 인물로는 마오쩌둥에어 시진핑이 두번째이다.
이어 2018년 3월 11일 중국전국인민대표회의 제3차 전체회의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및 3개대표론, 과학발전관과 함께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헌법 서문에 명기하는 5차 개헌안이 참석 2,964명 중 2,958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시진핑의 지도사상이 중국 헌법에도 반영되었다. 또한 이날 통과된 개헌안에는 헌법 79조 ‘연속 재임은 두 차례를 넘을 수 없다’는 문장이 삭제되어, 두번째 임기가 2022년까지였던 시진핑의 장기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시진핑은 3월 17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재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군사위 주석 등 집권 2기의 주요 지위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날 시진핑의 오른팔인 왕치산이 국가부주석으로 복귀했다. 2022년 10월 23일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시진핑의 총서기 3연임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시진핑은 2023년 3월 10일 전국인민대표대회 14기 1차 회의 제3차 전체회의의 국가주석 선거와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3연임을 하는 국가주석으로 기록되었다.
주요 정책
그는 관료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정치와 경제에 있어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개혁주의자로 알려졌다. 2014년 7월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6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반부패조치를 제도화했으며, 이 대회를 통해 시진핑의 1인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7년 10월 그의 지도 이념을 '시진핑 새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고 명명하여 당장(당헌)에 반영했다.
'시진핑 사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 그의 지도 이념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30여년 동안 급격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 누적되어 온 빈부·도농 격차, 심각한 부패와 민심 이반 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배경에 깔고 있다. 그는 일당통치 강화, 빈부격차 등을 축소할 균형적 성장과 경제에서의 국가 역할 강화, 사상 통제 등을 그의 통치 철학으로 정리했다. 주요 내용은 샤오캉 사회(小康)각주1) 확립, 개혁 심화, 의법치국(법치), 종엄치당(엄격한 당 관리) 등 4가지 전면 전략과 경제·정치·문화·사회·생태문명 건설을 추진하는 5위1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