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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다른 표기 언어 宋鎭禹 동의어 고하, 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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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9. 5. 8, 전남 담양
사망 1945. 12. 30, 서울
국적 한국

요약 해방 후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서는 한편,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의 행정고문을 지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생활의 편의를 도모함과 아울러, 이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이 되었다.
영학숙에서 평생지기인 김성수를 만났고, 1908년 홍명희의 권유로 김성수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1년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했으며,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동본사를 설립하여 동아일보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송진우(宋鎭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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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고하(古下).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옥윤(玉潤)이고, 7세 때부터 15세가 되던 1903년까지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의 친척인 기삼연(奇參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고하라는 아호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정읍의 유씨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그 딸이 3세 때 죽고 이후 자식을 얻지 못해 후사가 끊기게 되자 큰형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의 백양사에 들어가 다시 한학을 닦다가 부친의 권유로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부친은 그를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신학문학교인 영학숙(英學塾)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비록 이곳에서의 수학은 3개월 만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 평생지기인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1908년 가을 당시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교[大成中學校] 유학생이었던 홍명희의 강력한 권유로 김성수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그해에 한일합병이 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도일(渡日)하여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중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최남선·현준호·신익희·조소앙·김준연·장덕수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또한 '유학생 친목회'의 산하단체로서 '호남유학생 다화회(茶話會)'를 만들어 회장직을 맡는 한편, 이들 단체가 단순한 사교모임으로 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學之光〉을 펴내기도 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 이듬해 김성수가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를 인수하자 학감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했다. 3·1운동 때는 이 운동의 뒷일을 맡은 4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1년 반의 구금생활을 했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이후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립대학 설립운동,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汎)태평양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한민족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직책은 사장·고문·주필 등 시세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김성수를 대신하여 그는 언제나 〈동아일보〉 간행의 중추역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동아일보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직후 여운형이 주축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및 한국국민당의 결합체인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서는 한편,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인 J. R. 하지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생활의 편의를 도모함과 아울러, 이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보국의 활동도 재개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양론의 첨예한 소용돌이 속에서 12월 30일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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