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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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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한국 |
요약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정면에서 접근함으로써 민속학 연구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30년대 민속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주로 민속학을 연구했다. 1930년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과 같은 민속학 저서를 펴냈고,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더불어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했으며,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민속학 분야의 활동은 8·15해방 후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로 집대성되었다. 연구대상을 민간신앙, 무속, 생활민속, 세시풍속 등으로 확대했으며, 방법론도 한국 기층문화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문화사적 방법에 바탕을 두고 역사적, 인류학적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했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호는 남창.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주로 민속학을 연구했다. 본래는 역사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식민지 지배하에서 자유로운 연구가 어려워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 〈조선신가유편 朝鮮神歌遺篇〉·〈조선민담집 朝鮮民譚集〉과 같은 민속학 저서를 펴냈고,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더불어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했으며,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 朝鮮民俗〉을 창간했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 강사, 1934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면서 민속학을 강의했다. 민속학 분야의 활동은 8·15해방 후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로 집대성되었다.
그는 앞서 민속학을 연구했던 최남선·이능화 등이 민속학을 애국학이나 조선학의 하나로 또는 다른 학문의 보조적 수단으로 여겼던 데 비해, 민속사회학적·종교민속학적 토대 위에서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정면에서 접근함으로써 민속학 연구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연구의 대상을 민간신앙·무속·생활민속·세시풍속·통과의례·제도·전설 등으로 확대했으며, 방법론에 있어서도 한국 기층문화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문화사적 방법에 바탕을 두고 역사적·인류학적·사회학적·고고학적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했다. 또한 주변 민족의 민속에까지 시야를 넓힘으로써 비교민속학적인 측면에 도달했으며, 문헌적·이론적인 관심에 국한되지 않고 현장자료의 수집에까지 관심을 확대하여 민속학의 실증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1930년대 민속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민속학 연구는 한국문화의 세계성을 입증하려는 작업이었으며, 과거의 일본문화가 조선으로부터 항상 '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식민지 지배이념의 허구성을 논증하려 했다. 8·15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지내면서 본래의 관심이었던 한국 역사를 신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체계화하다가 6·25전쟁중 납북되었다. 그의 한국 민속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려는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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