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36. 1. 3, 고치[高知] |
---|---|
사망 | 1867. 11. 10, 교토[京都] |
국적 | 일본 |
요약
사카모토 료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막부시대 말기 일본이 일왕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변화하는데 기여했다.
소년시절 무예훈련에 열중하여 에도의 도장에서 수련을 쌓았다. 그곳에서 서구와의 조약체결과 쇼군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끊임없는 정쟁을 목격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하는 양이론자가 되었다. 그 후 도사 출신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하는 모임인 도사근왕당에 참여했다. 1864년 가쓰 가이슈가 창립한 해군조련소에 부관으로 입소하여, 가쓰를 통해 새로운 정치형태에 대한 구상을 듣는 등 식견을 넓혔다. 1866년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삿초 동맹을 맺어 막부 타도운동의 적극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그 후 왕정복고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으나 막부 타도 전에 암살당했다.
소년시절 무예훈련(특히 검술)에 열중하여 1853~54, 1856~58년에 에도의 지바 슈사쿠[千葉周作] 도장에서 수련을 쌓았다. 그곳에서 서구와의 조약체결과 쇼군[將軍] 계사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끊임없는 정쟁을 목격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하는 양이론자(攘夷論者)가 되어 도사로 돌아와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참여했다.
1862년 다시 에도로 가서 개국론의 옹호자로 알려진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암살하고자 했으나, 군비부족상태에서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서양에 대항할 만한 군비를 갖추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가쓰에게 설득되었다. 1864년 가쓰가 창립한 해군조련소에 그의 부관으로 입소했으며, 가쓰를 통해 새로운 정치형태에 대한 구상을 듣는 등 식견을 넓혔다.
그러나 같은 해 가쓰가 파면되자, 사쓰마 한[薩摩藩]으로 탈주하여 부관시절에 알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의 도움을 얻어 직접적인 개인행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나가사키[長崎]에서 나가사키와 사쓰마, 조슈[長州] 간에 서양식 총포를 거래하기 위한 조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사의 전 한슈[藩主] 야마노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의 탄압을 피해 근왕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1838~67]와 재회하여 함께 활동했다. 1866년 교토에서 사이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77]와 함께 삿초 동맹[薩長同盟]을 맺어 바쿠후 타도운동의 적극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동맹 성립 직후 바쿠후의 포위망을 벗어나, 삿초 동맹의 성립 등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던 도사 한으로 돌아가 거주허가를 받았다(1867. 4). 이후 도사 한의 원조를 받아 해운과 무역을 담당하는 해운회사를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칭하고 이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7월에 나카오카는 이와 병행하는 리쿠엔타이[陸援隊]의 창립 허가를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도사 한은 과거 한을 탈출한 로닌[浪人]의 도움을 얻어 사쓰마 한과 협력해 왕정복고를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나아가 사카모토는 가쓰에게 의탁하고 있던 시기에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권을 조정에게 반환'하고 '공의에 기초하여 의정국(議政局)이 정무를 결정'한다는 구상을 포함한 선중8책(船中八策)을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야마노우치가 1867년 10월 3일 로주[老中]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靜]를 통해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제출한 대정봉환에 대한 건백서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요시노부가 조정에 대정봉환을 상주(14일)하고 삿초 양 한이 바쿠후 타도에 성공하기 전에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서 바쿠후 지지파에게 암살당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