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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4. 8. 12,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브리스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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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3. 3. 21, 컴벌랜드 케직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시인·잡문작가.
초기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동료로서 주로 기억된다.
브리스틀에서 직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바스에서 고모 엘리자베스 타일러의 보살핌을 받으며 보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다닐 때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친구들과 함께 창간한 교지에 교내에서 행해지는 지나친 매질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그의 반항적인 기질을 일깨웠으며,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792년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했을 때 프랑스 혁명에 대해 뜨거운 공감을 표시한 장시 〈잔 다르크 Joan of Arc〉(1796)를 썼다.
뜻을 같이하던 콜리지를 1794년에 처음 만나 운문극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The Fall of Robespierre〉을 함께 써서 그해에 출판했다. 학위를 따지 못한 채 옥스퍼드대학교를 떠난 뒤, 콜리지가 생각해낸 이상적 농업공동체를 미국 서스쿼해나 강가에 실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상적 농업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콜리지와도 잠시 사이가 틀어졌다. 1795년 사우디는 콜리지가 곧 결혼할 상대였던 세이라의 자매 에디스 프리커와 몰래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고모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고, 고모는 사우디가 자기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
1795년말 리스본에서 영국인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던 숙부를 따라 포르투갈로 갔다.
그곳에서 쓴 편지들을 모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잠시 머무는 동안 쓴 편지 Letters Written During a Short Residence in Spain and Portugal〉(1797)라는 책을 펴냈으며, 이 두 나라의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영국인임을 신께 감사하게' 되었다. 혁명적인 인물에서 보수주의자로의 탈바꿈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1800~01년 2번째 포르투갈 방문 때 더욱 굳어졌다. 법률 공부도 해보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179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학교 시절 친구인 찰스 윈의 주선으로 160파운드의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연금은 9년 동안 계속 지급되었다.
1797~99년에 2번째 시집을 펴냈다. 사우디는 이무렵 전업작가로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몇 해 동안 가장 뛰어난 짧은 시와 발라드를 발표하고, 여러 신문과 평론지의 고정 기고가로 일했다.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토머스 채터턴의 작품을 편집하고, 서사시 〈마도크 Madoc〉(1805)를 써나가면서 또다른 서사시 〈파괴자 살라바 Thalaba the Destroyer〉(1801)를 완성했다.
1803년 사우디 부부는 당시 케직의 그레타홀에 살고 있던 콜리지 부부를 방문했다.
사우디 부부는 말년까지 그레타홀에서 지냈는데, 이는 세이라와 에디스 자매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당시 그래스미어 가까이에 살고 있던 워즈워스와의 우정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우디 부부는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콜리지가 가족을 남겨두고 몰타로 간 뒤에는 그레타홀의 모든 식구가 한동안 사우디에게 의지해서 가계를 꾸려갔다. 이때문에 사우디는 시, 비평, 역사서, 전기, 기사, 번역, 선배작가들의 작품편집 등 쉴 새 없이 작품활동을 해야만 했다.
1809~38년 사이에 보수주의 계열의 〈쿼털리 리뷰 Quarterly Review〉에 편당 100파운드의 고료를 받고 모두 95편의 정치 기사를 썼다. 오늘날 가장 흥미를 끄는 기사는 국가가 사회복지를 법제화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포르투갈 역사를 쓰기로 계획했으나 완성하지 못했으며, 3권으로 된 〈브라질 역사 History of Brazil〉(1810~19)만을 펴냈다.
1813년 월터 스콧 경의 추천으로 계관시인에 임명되었으며, 1807년 친구 찰스 윈이 그에게 지급되도록 해준 160파운드의 정부 연금이 1835년에는 그가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뜻에서 300파운드로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경제적 안정은 얻었으나, 무책임한 정치적 견해가 주된 특징을 이루는 초기 운문극 〈와트 타일러 Wat Tyler〉를 1817년 허가 없이 출판했다. 이 책은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대중에게 그가 젊었을 때 공화주의자였음을 상기시킬 구실이 되었다. 이무렵 그를 싫어한 바이런 경과 문학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바이런은 1819년 위선을 풍자한 시 〈돈 주안 Don Juan〉의 제1편을 사우디에게 바치는 한편, 〈심판의 광경 The Vision of Judgment〉(1822)이라는 제목으로 사우디의 시 1편을 멋지게 흉내 냈다. 말년에는 아내의 정신이상, 1837년 아내가 죽은 뒤 재혼하면서 생긴 집안 싸움, 그 자신의 쇠약해져가는 심신 때문에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몇 편의 서정시와 발라드를 비롯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보낸 나날은 흘러갔다 My days among the Dead are past〉·〈블레넘 이후 After Blenheim〉, 익살스러운 창작시의 걸작으로 꼽히는 〈인치케이프 록 The Inchcape Rock〉 등 익살스러우면서도 기괴한 시를 빼면 오늘날까지 읽히는 시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해하기 쉽고 명쾌한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고 오랫동안 평가받아온 산문이 더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으로는 아직도 고전으로 꼽히는 〈넬슨의 생애 Life of Nelson〉(1813)·〈웨슬리의 생애:감리교의 성립과 발전 Life of Wesley:and the Rise and Progress of Methodism〉(1820), 가공의 한 스페인인의 눈에 비친 갖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영국에서 보낸 편지 Letters from England:By Don Manuel Alvarez Espriella〉(1807) 등이 있다.
그리고 주석·인용문·일화 등을 모아놓은 환상적이고 산만한 글모음 〈의사 The Doctor〉(7권, 1834~47)를 익명으로 펴냈으며, 이 책에는 어린이를 위한 고전으로 유명한 〈3마리 곰 이야기 The Story of the Three Bears〉도 실려 있다. 이러한 산문에 비해 성공하지 못한 서사시 〈파괴자 살라바〉·〈마도크〉·〈케하마의 저주 The Curse of Keha ma〉(1810)·〈마지막 고트인 로데릭 Roderick, the Last of the Goths〉(1814) 등은 각각 아랍, 아스텍족이 지배하던 멕시코, 힌두교도가 지배하던 인도, 서고트족이 지배하던 스페인을 무대로 신화나 전설 속의 주제를 다룬 운문 로맨스이다.
그가 속해 있던 문학계와 친구들에 대해 자세히 적은 방대한 편지와 산문 속에서 타고난 글재주가 잘 드러나 있다. 윌리엄 해즐릿과 스콧 같은 당대의 저명인사들뿐만 아니라 바이런 같은 적대자까지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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