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루자티아, 슐레지엔·모라비아와 국경을 접하던 왕국이었으나 1968년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에 포함되었고 1993년부터 체코에 속한다.
5~6세기경 슬라브계 체코인들이 보헤미아의 비옥한 지역을 장악하여 12세기까지 오스트리아 일부 지방부터 아드리아 해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13세기 후반 쇠퇴하였으나 14세기 유럽 전체의 지식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526년 이후 보헤미아는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으로 혼란 상태에 빠진 상태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848년 혁명의 시기를 거친 뒤 체코인의 민족 감정이 깊어졌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이념을 공표하여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서쪽으로 바이에른, 북쪽으로 작센·루자티아, 동쪽으로 슐레지엔·모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몇 세기 동안 하나의 왕국이었으나 1918~39, 1945~4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서쪽 끝의 주(州)가 되었다. 그러나 1949년 1월 1일 주 조직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여러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나뉘면서 정치적 독자성을 잃었다. 1968년 보헤미아, 모라비아, 분리자치도시 프라하가 합쳐져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5~6세기경 슬라브계 체코인들이 보헤미아의 비옥한 지역에 굳건히 자리잡았다.
초기 연대기는 리부셰 공주가 밭에서 일하는 농부 프르셰미슬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는 식의 반(半)신화적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처음 몇 세기 동안 체코인들은 외부세계로부터 어떤 주목이나 적대감도 받지 않고 세력을 구축했던 것 같다. 9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 학자들에게는 좀더 분명한 역사, 체코인들에게는 좀더 격동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슬라브어권 민족을 개종하려던 초창기 독일 성직자들의 노력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이웃 모라비아(지금의 체코)에서 온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어로 설교를 하고 슬라브 발음에 맞게 고친 그리스 문자를 이용해 보르지보이 군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873경). 볼레슬라프 1세는 935년 동생 성(聖) 바츨라프를 죽인 뒤 아들 볼레슬라프 2세와 함께 동쪽으로 모라비아, 북쪽으로 슐레지엔과 갈리치아(두 곳 모두 지금의 폴란드에 있음)까지 보헤미아 세력을 확장했다.
이 영토들을 잃고 다시 뺏으면서, 때로는 정략결혼을 통해 통치자들이 독일과 폴란드 군주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외적 분쟁과 내적 싸움의 오랜 역사가 시작되었다. 보헤미아의 영향력은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도 커져 1088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하사했고, 보헤미아 솔레슬라프 군주는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영향력있는 자리를 얻기도 했다.
1212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왕의 권력을 증대시키고 제국에 대한 의무를 감소시킨 '시칠리아 금인칙서(金印勅書)'를 발표했다.
보헤미아 국력은 오스트리아 일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헝가리와 영토전쟁을 감행하여 아드리아 해(海)까지 지배권을 넓힌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 치하에서 새로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278년 오스트리아 침공에서 오타카르가 죽은 뒤 보헤미아는 영토범위와 영향력 면에서 곧 쇠퇴하기 시작했다.
왕위계승 문제로 논란이 일어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카렐 1세로서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면서 1348년 프라하대학교를 설립하고 프라하의 경계와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때부터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직접 통치영역인 동시에 유럽 전체의 지식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카렐 왕이 이룩한 이 평화는 로마 가톨릭교도와 1415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 추종자들 사이의 종교분쟁으로 대부분 깨졌다.
후스주의자거나 로마 가톨릭교도거나 모든 보헤미아인은 독일과 영국 십자군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몇 년 동안을 견뎌냈다. 1436년 보헤미아에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협정이 공포되었으나 이것이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그후의 논쟁에서 귀족들은 왕을 희생시켜 권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왕실이 항상 지원을 받아온 마을사람과 농민에 대한 권력도 장악했다.
국민들은 많은 자유를 빼앗기고 일부는 농노로 전락하기도 했다. 1526년 보헤미아는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전의 두 왕은 주로 헝가리에 살았고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보헤미아에 합스부르크 왕조를 세웠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1세는 한동안 종교문제를 관대하게 대했으나 결국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대립하게 되고 이 대립관계는 다음 왕위계승자에게까지 이어졌다.
1618년 프라하 대주교가 프로테스탄트 종교의식 금지를 명령했을 때(이것은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루돌프 2세가 조인한 협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음) 왕의 고문관 2명이 흐르자디차니 성(城)의 창문 밖으로 던져진 사건이 일어났다. '프라하의 창문 밖 내던지기'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실패하여 결국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추방되고 보헤미아는 거의 완전히 오스트리아에 흡수되었다. 이 상황은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슐레지엔은 프로이센 영토가 되었고 새 통치자는 그래머 스쿨과 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교육언어로 제정하여 체코의 민족주의 감정은 사라진 듯했다.
체코어는 농민의 언어로 여겨진 반면 상류사회와 공공생활에서는 독일어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은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1848년 혁명의 시기를 거친 뒤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중산층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주데텐 독일인)들이 존재함에 따라 체코인의 국민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주데텐 독일인은 대부분 오타카르 2세의 초청으로 13세기에 보헤미아에 이주한 독일 장인(匠人)의 후손이었다. 1880년 체코어에도 독일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법령이 포고되었으나 독일계 주민은 여전히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체코인들은 내부의 주데텐 독일인보다 외부의 슬라브인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고, 러시아인과 특히 모라비아의 슬로바키아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주데텐 독일인과 합스부르크가(家) 출신 보헤미아 통치자들은 체코의 범슬라브주의에 이질감을 느꼈고, 토마슈 마자리크는 프라하대학교에서 지식인들을 규합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이념을 공표했다.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됨에 따라 현재는 체코에 속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