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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

다른 표기 언어 文一民 동의어 문희석, 文熙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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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4. 12. 10, 평남 강서
사망 1968. 10. 11
국적 한국

요약 독립운동가.

호는 무강. 일명 일민·희석·현철.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한 후 동년 7월 남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한족회 중앙본부의 특명을 받아 평양에 잠입, 애국청년회와의 연락과 조직 강화 등의 사명을 완수하고 만주로 귀환했다. 12월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해 별동대원으로 활약했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국내 주요도시의 일제기관을 폭파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라는 광복군총영의 지령에 따라 대한청년단에서는 5개의 폭격대를 조직했는데, 그는 제2폭격대장에 임명되어 우덕선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평안남도 안주 입석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했다. 1920년 8월 우덕선과 함께 평안남도 도청 경찰부를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칠성문에서 일경 순사 1명을 사살한 후 상하이로 갔다.

1921년 9월 상하이 싼위대학[三育大學]에 입학, 수학중 중퇴했으며, 1922년 8월 국제정세 시찰을 위해 프랑스·멕시코 등지를 순회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4년 9월 윈난[雲南]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전공했다. 1925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며, 3월 13일 곽헌·최석순(崔錫淳)·강창제·나창헌 등과 '이승만탄핵결의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1926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 군사훈련주임에 취임하고 군사교련에 주력했다. 1928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 한국노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중국혁명군 상교참모로 임명되어 항일전선에서 분투했다. 1931년 9월에 한국군인회 조직에 참여해 군인회간장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계획을 세웠다. 1933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했으며, 흥사단 원동반에 가입했다. 12월에는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해방때까지 의정활동에 참가했다.

1934년 제26회 의정원에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6년 신한민주당 조직에 참가했다. 1943년 4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유동열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했으며,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1950년 애국동지후원회를 조직, 1954년 회장에 추대되었고,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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