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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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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59. 3. 22, 오스트리아 비너 노이슈타트
사망 1519. 1. 12, 벨스
국적 신성 로마

요약 탁월한 외교력과 정치적 현실감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를 16세기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결혼을 통해 네덜란드를 획득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조약과 군사적 압력으로, 스페인과 스페인 제국을 아들 필리프의 혼사를 통해 각각 손에 넣음으로써 오스트리아 본래의 영토에다 광활한 영토를 더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
중부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까지를 포함하는 막시밀리안의 복잡한 동맹 체제는 그를 유럽 정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손자 카를이 황제에 선출되도록 하고 투르크족에 대항해 유럽을 단결시키기 위해 죽기 전 1년 동안 노력하다가 1519년 1월 12일 오버외스트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493~1519년 재위

ⓒ Albrecht Dürer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1493~1519 재위)를 지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를 16세기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결혼을 통해 네덜란드를 획득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조약과 군사적 압력으로, 스페인과 스페인 제국을 아들 필리프의 혼사를 통해 각각 손에 넣음으로써 오스트리아 본래의 영토에다 광활한 영토를 더했다. 또한 주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 그의 손자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을 계승했다.

영토확장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勇膽公) 샤를의 딸 마리와 결혼함으로써 네덜란드와 프랑스 동부 변경지역에 걸친 넓은 부르고뉴 영토를 차지했다.

1479년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등 프랑스 루이 11세의 공격에 맞서 새로이 확보한 영토들을 잘 지켜나갔다. 1482년 마리가 사망한 후 막시밀리안은 네덜란드 의회가 어린 필리프(후에 카스티야의 미남왕 펠리페 1세가 됨)의 섭정 역할을 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1485년 전쟁을 일으켜 의회를 무찌르고 섭정권을 되찾았다. 한편 그는 1482년의 아라스 조약에 의해 딸 마르가레테와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약혼에도 동의해야 했다.

1486년 그는 신성 로마 황제(부친의 상속자로서)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4월 9일 아헨에서 즉위했다. 그는 스페인·영국·브르타뉴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프랑스 및 네덜란드 반란세력과 전쟁을 계속했다.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1490년 대리인을 통해 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했으나 프랑스의 브르타뉴 침공을 막지는 못했다.

사태가 극적으로 악화되어 샤를 8세가 약혼녀인 마르가레테를 막시밀리안에게 되돌려보내고, 안에게 막시밀리안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촌인 지기스문트 대공을 통해 막시밀리안은 티롤을 손에 넣었다. 티롤의 주요도시 인스부르크는 은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위치라는 점 때문에 막시밀리안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1490년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래 영토 대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는데 그때까지 이 영토는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공위이던 헝가리의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자 그는 블라디슬라프에 대해 군사활동을 일으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또한 1491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블라디슬라프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경우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이 합스부르크가로 넘어오도록 만들었다.

1493년 상리스 조약을 맺어 네덜란드 및 프랑스와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 등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중에 들어가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권력강화

1493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여 독일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된 막시밀리안은 남동부 국경지대에서 투르크인들을 몰아냈다.

1494년 밀라노의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저지대 지방을 아들 필리프에게 물려주고 통치는 공동으로 하도록 조치해놓았다. 저지대 지방의 융성한 문화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모든 지역의 문학·미술·정부형태·정치·군사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94년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유럽의 세력균형이 깨졌다(이탈리아 전쟁). 1495년 막시밀리안은 나폴리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교황·스페인·베네치아·밀라노 등과 함께 이른바 신성동맹을 맺었다.

1496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했으나 별로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해 아들 필리프를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와 결혼시키고 1497년 딸 마르가레테를 스페인 왕자와 결혼시킨 사실이다. 이 결혼을 통해 막시밀리안은 스페인과 그 식민지에 대한 계승권을 확보했다.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Reichstag)에서 막시밀리안은 제국의 강화를 꾀했다(보름스 의회). 의회에서는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과 세제를 개혁하고 항구적인 공공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법률을 마련했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군사제도와 행정제도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다.

군주들은 중앙권력의 강화를 용인하려 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제한은 제국정책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마인츠 대주교인 대법관 베르트홀트가 이끌던 반대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막시밀리안은 초헌법적인 사법 재정위원회를 독자적으로 설치했다. 한편 그는 1499년 스위스 연방과의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그해 9월 22일에 체결한 바젤 평화조약에 의해 사실상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 프랑스는 스페인과 협력하여 재차 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의 제국 봉토를 점령했다(슈바벤 전쟁).

150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제국의 군주들은 막시밀리안에게서 권력의 상당 부분을 박탈해 21명의 선제후를 포함한 독일 군주들로 구성된 최고위원회격인 제국통치평의회(Reichsregiment)에 그 권력을 귀속시켰다.

제국의 군주들은 심지어 막시밀리안을 폐위시키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군주들 각자의 냉담함과 막시밀리안의 효과적인 대응조치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그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으며 1504년 바이에른과 라인 팔츠 사이의 왕조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제국 내에서의 위신을 회복했다. 이와 함께 마인츠 대주교 베르트홀트의 사망으로 주요한 적대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 사라졌다. 푸거 가문과 같은 남부 독일의 기업들과 신용협정을 맺어 국내외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으며 1506년 헝가리에 군사원정을 일으켜 헝가리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권을 한층 강화시켰다.

막시밀리안은 독일 왕이었지만 관례에 따라 교황에 의해 황제의 왕관을 받지 못했으며 적대세력인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축출당한 후에는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갈 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1508년 2월 4일 교황 율리오 2세의 동의에 의해 수여된 로마 황제 선출자 칭호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대항해서 1508년 프랑스·스페인·교황이 함께 참여하는 캉브레 동맹에 가담했다.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분할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어 발발한 전쟁에서 막시밀리안은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중병을 앓게 되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교황에 오르는 문제를 고려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분열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피사 공의회가 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때로는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한편으로는 반교권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교황경쟁자가 된다면 독일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라곤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 2세의 만류로 이 생각을 단념했다.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는 1511년 교황·스페인·영국과 그 연합세력들에 의해 새로 결성된 신성동맹에 가담했다. 1513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그는 스푸르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동맹군들은 밀라노와 롬바르디아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515년 프랑스는 마리냐노 전투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승리했으나 밀라노를 다시 차지하려던 막시밀리안의 노력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브뤼셀 조약으로 밀라노는 프랑스에 넘어갔으며 베로나는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막시밀리안에게는 단지 티롤 국경 영토만이 남게 되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해 폴란드·보헤미아·헝가리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의 팽창계획에 동조하도록 할 수 있었다.

1515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왕가 사이에 유리한 혼인관계가 맺어졌으며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가는 같은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 위상을 강화했다. 중부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까지를 포함하는 막시밀리안의 복잡한 동맹 체제는 그를 유럽 정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손자 카를이 황제에 선출되도록 하고 투르크족에 대항해 유럽을 단결시키기 위해 죽기 전 1년 동안 노력하다가 1519년 1월 12일 오버외스트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했으며 비너노이슈타트의 게오르크 성당에 묻혔다(인스부르인스부르크호프 성당에 있는 그의 거대한 묘지는 후에 세워진 것임). 이미 스페인 왕이었던 그의 손자가 그해말 카를 5세로 황제에 즉위함으로써 막시밀리안의 계획은 결실을 보았다.

평가

막시밀리안의 업적은 위대한 것이었지만 그의 야심에 비추어볼 때는 보잘것없었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을 부활시킴으로써 서유럽 전역을 통합하기를 원했다. 종종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곤 했지만 새로운 사고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으며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의 진흥에도 열정적이었다. 라틴어로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을 세웠으며 자전적인 내용으로 된 시적인 우화 〈백색왕 Weisskunig〉·〈용감한 생각 Teuerdank〉을 직접 썼다. 또한 사냥에 관한 논문인 〈수렵비법 Geheimes Jagdbuch〉을 집필했으며 자신의 치세를 기리기 위한 사업에 시인들과 예술가들을 동원해 분주히 활동하도록 했다.

군사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가진 그는 전쟁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군사·행정 분야에서 실속있는 개혁을 실시했으나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 미덥지 못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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