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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다른 표기 언어 Maria Ther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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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17. 5. 13, 빈
사망 1780. 11. 29, 빈
국적 신성 로마

요약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의 세력 각축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질적인 나라들이 모여 있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매력적인 자연스러움을 가진 왕녀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하나였고 어떤 역사가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하여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상속권에 도전하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이 일어났다. 프로이센과의 이 싸움에 뒤이어 7년전쟁(1756~63),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1778~79)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더욱 견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 Sporti/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하여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상속권에 도전하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이 일어났다.

프로이센과의 이 싸움에 뒤이어 7년전쟁(1756~63),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1778~79)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더욱 견제했다.

초기생애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카를 6세의 외아들이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의 남자 가운데 카를 6세의 직계로는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카를은 딸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른바 국사조칙(Pragmatische Sanktion)이라는 법령을 내렸고, 결국에는 대부분의 열강이 이를 승인했다(유럽의 거의 모든 주요국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탐냈기 때문에 그들이 국사조칙에 동의한 것은 편의에 따른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 이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의 정치판에 인질로 잡힌 상태가 되었다.

1736년에 그는 로렌의 프란츠 스테판과 결혼했다. 프랑스가 로렌 지방과 합스부르크의 영토 통합을 반대했기 때문에 프란츠 스테판은 토스카나 대공국의 계승권을 얻기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로렌 공작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혼은 연애결혼이었고 부부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남은 자녀는 10명이었다.

유년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

ⓒ PancoPinco/wikipedia | Public Domain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해가 끝나기도 전에 카를 6세가 생전에 그토록 막으려고 애썼던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카를이 죽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국고는 텅 비어 있었으며, 수도는 소요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천진난만한 용기로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그리고 남편을 공동통치자로 임명했을 때) 유럽의 총리들은 아연실색할 만큼 놀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영토 가운데 가장 번창한 슐레지엔 지방을 침략해온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후에 프리드리히 대왕)와 협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선왕 카를 6세를 모시던 원로신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까다롭기로 이름난 헝가리 의회에 나타나 대대적인 군대소집을 호소하여 성공을 거두자 그녀는 유럽에서 외교수완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프리드리히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공격한 군주들 가운데 하나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굴욕감을 느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이미 이름뿐인 지위에 불과했지만 300년 동안 관례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습해왔었다. 카를 알베르트가 죽자(1745)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혔다. 여자가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정개혁

마리아 테레지아는 상당한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하우크비츠 백작의 계획안을 받아들였다.

백작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신의 자문위원회에 잇따라 끌어들인 뛰어난 지성인 가운데 첫번째 인물이었다. 많은 귀족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주들로 이루어진 의회의 권한을 과감하게 줄였다(헝가리 의회는 제외). 이 의회는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돈주머니 끈을 움켜쥐고 돈의 출납을 관장해왔었다.

의회를 지배하는 대지주들은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 면세권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을 즐겁게 하는 평등'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대대로 물려받은 백성들의 노동력에 대한 봉건 영주의 권리에 대해서는 그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몇 년 뒤 기근에 시달리던 보헤미아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나고, 헝가리 대지주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고받은 뒤에야 노동력의 강제 이용을 제한하게 되었다.

"농민은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에 지침이 된 것은 이론적인 인도주의가 아니라 실제적인 고려였으며 반드시 재정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확대된 중앙정부(여기서 사법부가 분리된 것은 1749년이었음)와 여러 차례에 걸쳐 개편된 국가재정은 박식한 관리와 법관을 필요로 했다.

이들을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고등교육의 유일한 목표라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예수회에 헌신적이었지만, 주치의인 네덜란드 의사 게르하르트 반 스위텐이 예수회의 손에서 대학을 빼앗아 과감한 개혁(교과서 도입, 빈대학교 의학부와 갓 생긴 공중위생국의 연결, 교수진이 선출한 학장에 대한 군주의 거부권)을 실시하자 그 변화를 승인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철저한 가톨릭 군주로 예수회가 설립한 사회기관을 절대 폐쇄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음). 그녀는 신앙이 독실하고 율법에 엄하고 편협한 태도는 거부했지만 교회를 국가 권력에 종속시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외관계

그녀는 1745년에 강화조약(오스트리아는 이 조약으로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했음)을 맺고 1748년에도 강화조약(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을 제외한 나머지 적국과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전쟁이 끝났음)을 맺었지만 군대를 근대화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 오스트리아 총리가 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의 현란한 구상은 빼앗긴 슐레지엔을 되찾고 프로이센을 쳐부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불을 붙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명한 '동맹의 역전'을 감행하여(1756), 옛날의 동맹국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물주'나 다름없었던 영국을 버리고 오랜 숙적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그녀는 유럽의 경쟁 무대에 새로 뛰어든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녀는 뒤이은 7년전쟁의 광범위한 파장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7년전쟁이 끝나 슐레지엔 상실이 확정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평화옹호자가 되었다. 나중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합스부르크 영토의 공동 통치자가된(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고집 센 맏아들 요제프 2세가 위험을 무릅쓰고 프로이센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79년 무렵 혼자 힘으로 또다른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프란츠는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1765년에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오랫동안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섰으며 일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새로운 공채(公債) 정책, 헝가리의 빈 땅에 주민을 정착시키는 문제, 각지의 서로 다른 제도가 빚는 혼란을 없애기 위한 형법 기초, 그리고 일종의 구빈법 등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직접 손댄 수많은 개혁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책에서 얻은 지식은 부족했지만 이런 약점을 보완해주는 뛰어난 분별력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녀는 교회가 속세의 문제에서 손떼게 하는 조치를 강행하면서 백성의 지적 생활을 통제하는 것이 나라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부의 검열을 제도화한 사람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였으며 초등교육 의무화 계획을 처음 시작한 사람도 그녀였다.

말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을 주의깊게 감독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많은 실망을 맛보아야 했다.

아들 가운데 토스카나 대공국의 레오폴트(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만이 어릴 때는 다소 까다로웠지만 어머니의 기대에 맞게 성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각별히 사랑한 자녀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이 딸의 연애결혼을 허락했고 막대한 돈을 선물로 주었다. 딸들 가운데 3명은 호감을 주지 못하는 부르봉 왕가 출신의 파르마 왕, 나폴리 왕, 프랑스 왕과 각각 결혼했는데 이 딸들은 너무 고집이 세거나 어리석어 어머니를 여러 번 화나게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음을 앞두고 후에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실제적인 충고와 설교를 퍼붓는가 하면 무서운 경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미망인 시절을 가장 어둡게 만든 것은 맏아들 요제프와의 끝없는 불화였다. 요제프는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철학'을 장난삼아 집적거림으로써 그녀를 놀라게 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함으로써 그녀를 화나게 했으며, 방만한 해외사업을 벌임으로써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요제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서로 상대를 퇴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요제프가 카우니츠의 지지를 얻어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의 부도덕성을 크게 개탄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공중도덕단(흔히 쓰인 용어로는 '순결위원회')을 창설했다는 이유로, 또는 고상한 체하면서도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루이 15세의 애첩인 마담 드 퐁파두르의 도움을 얻었다는 이유로 조롱을 받았을 때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사태 때 외국의 왕실들로부터 '눈물을 머금은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는 몹시 괴로워했다.

살이 찌고 건강이 나빠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주도로 개축한 교외의 쇤브룬 궁전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늦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용적인 개혁이 결국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제프 2세의 통치를 특징짓는 계몽 독재의 길을 평탄하게 닦아주는 데 기초가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평가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의 세력 각축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질적인 나라들이 모여 있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매력적인 자연스러움을 가진 왕녀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하나였고 어떤 역사가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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