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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최초로 만들어진 민간 신문. 1919년 8월 21일 〈독립〉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다. 1919년 10월 15일자 제22호부터 '독립신문'으로 개칭되었다. 1924년 1월 1일자 제169호부터는 〈독립신문〉이라고 한글로 표기했다. 발행 장소는 프랑스 법조계 늑로동익리 5호였고, 4면 6단제로 매주 화·목·토요일 3회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독립사상의 고취와 민심통일, 우리의 사정과 사상의 전달, 여론의 환기, 신학술과 신사상의 소개, 한국의 역사와 국민성 개조 및 신국민의 창조 등의 5대 사명을 천명했다. 일제가 해외 민족지의 국내반입을 금지하자 연통제를 통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1925년 11월 11일 종간호를 발행하기까지 189호를 발행하는 동안 재정난으로 여러 차례 발행이 중단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조직 직후에 신문의 발행을 추진했으나 당시 상하이에는 한글활자가 없어 신문발행이 늦어지다가 조동호(趙東祜)가 한글성서에서 글자체를 본떠서 활자를 만듦으로써 1919년 8월 21일에 비로소 창간되었다. 이 신문이 나오기 전에 임시정부에서는 1주일에 3번씩 내는 등사판 인쇄의 〈우리 消息〉이라는 통신을 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독립 獨立〉이라는 제호로 21호까지 내다가 1919년 10월 15일자 제22호부터 '독립신문'으로 개칭되었다. 제호는 본디 한자였는데, 1924년 1월 1일자 제169호부터는 〈독립신문〉이라고 한글로 표기했다. 발행장소는 프랑스 법조계 늑로동익리 5호였고, 4면 6단제로 매주 화·목·토요일 3회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했다. 사장 겸 주필에 이광수, 편집국장 주요한, 영업국장 이영렬, 그리고 기자로 조동호·옥관빈·최근우·박현환·고진호·차관호·백성욱·김득형·김차룡·나재문·유병기·장만호 등이 참여했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첫째, 독립사상의 고취와 민심통일, 둘째, 우리의 사정과 사상의 전달, 셋째, 여론의 환기, 넷째, 신학술과 신사상의 소개, 다섯째, 한국의 역사와 국민성 개조 및 신국민의 창조 등을 5대 사명으로 열거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동상 및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동향에 관심을 갖고 보도했으며, 국내외 애국지사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또한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창간을 알리는 등 국내외에서 발행되는 조선인 신문의 동향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친일지와 반민족적 언론에 대해서는 일일이 비판했다.
〈독립신문〉은 국내, 중국 대륙, 만주, 러시아, 미국 등지의 교포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그러나 국내에 우송된 것은 거의 경찰에 압수되었으며, 인편으로 유입된 것들이 일부 전해졌을 뿐이었다. 일제가 해외 민족지의 국내반입을 금지하자 연통제(전국 각지에 책임자를 두고 동지를 규합하는 방법)를 통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독립운동의 진행상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 1922년 7월 부록으로 〈중외보 中外報〉를 간행하여 무료로 배포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1925년 11월 11일 종간호를 발행하기까지 189호를 발행하는 동안 재정난으로 여러 차례 발행이 중단되었다. 1920년 6월 24일자 제86호 이후 같은 해 12월 18일 제87호를 속간할 때까지 거의 6개월간 발행되지 못하기도 했다. 박은식이 사장으로 재직한 1년 동안은 극심한 경영난으로 겨우 7회가 발행되었으며, 그의 사망과 함께 폐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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