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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07년 내상직을 고쳐 만들었고. 1409년에 별도로 내시위를 만들었다가 1424년 내금위에 합쳤다. 내금위는 겸사복과 함께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부대여서 5위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내금위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세조는 내금위를 궁중에 숙직하여 왕을 경호하게 했다. 선발도 신중을 기하여 동서반 3품 이하관, 양반가문의 자제 중에서 무재도 탁월한 자들로 뽑았다.
왕이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왕의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부대로 실질적 특혜가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연산군 때는 수가 500명으로 늘었고 이후 약 40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때 폐지했다가 1601년에 부활했으며, 나중에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으로 통합했다.
1407년(태종 7) 내상직(內上直, 內廂直)을 고쳐 만들었다. 1409년에 별도로 내시위를 만들었다가 1424년(세종 6) 내금위에 합쳤다. 조선초에 군제를 정비하면서 갑사·별시위·겸사복 등 여러 종의 시위군을 만들지만 내금위는 겸사복과 함께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부대였다. 이때문에 문종대 이후 5위체제로 군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갑사와 별시위는 일반 병종으로 변하지만, 내금위는 5위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내금위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세조는 내금위를 독립아문으로 성립시켜 내금위장은 5위장과 별도로 번갈아 궁중에 숙직하여 왕을 경호하게 했다. 선발도 신중을 기하여 간혹 여진족이나 특출한 무예를 지닌 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입속시킨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동서반 3품 이하관, 양반가문의 자제 중에서 무재도 탁월한 자들로 뽑았다. 병력은 성종 때까지는 60~200명 사이에서 변동이 심했는데 〈경국대전〉에는 190명으로 했다. 이들은 정3품에서 9품까지의 체아직을 받았으나 장번(長番)이며, 품계가 있는자가 많아 무신으로 대우받았고 108일을 근무하면 정3품에서 거관했다. 내금위는 취재(取才) 없이 만호로 차정할 수 있었는데, 만호직이 고역이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왕이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왕의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부대로 법전상의 규정보다는 실질상의 특혜가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양계에 군관으로 파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일일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성종 때 이후 양계 파견이 증가하여 예차내금위(預差內禁衛)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병력이 증가하여 연산군 때는 500명으로 늘었다. 이후 약 40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1505년(연산군 11)에 내금위는 형철위(衡鐵衛), 예차내금위는 소적위(掃敵衛)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 환원했다. 임진왜란 때 폐지했다가 1601년(선조 34)에 복설했으며, 나중에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으로 통합했다.→ 금군삼청, 내금위장, 용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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