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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산, 호는 진혼(震魂). 고향에 있는 오암서원(梧岩書院)에서 7년 동안 한학을 공부하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숭실전문학교에 재학 중 김화촌(金花村)과 함께 평남 대동군에서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3학년 때는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는 김홍서(金弘敍)와 비밀 문서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구금을 당하였다.
졸업 후 평양의 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게 태형을 받았다. 이후 전남 광주의 숭일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항일 의식을 고취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6월형을 언도 받고 풀려났다.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 단원 최양옥(崔養玉)·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와 함께 대동단(大同團) 단원 전협(全協)과 연락을 취하며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김석우(金錫雨) 등과 함께 해삼위(海蔘威)에서 남석동(南石洞)이란 한인부락을 건설하여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독립 운동 기반을 확충하는 데 힘썼다. 이후 산시성[山西省]에서 최양옥·신덕영·안창남(安昌男) 등과 항일결사 단체인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일제의 밀정에게 발각되어 천진감옥에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출옥한 그는 공명단원들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북만주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필요한 기금 모집과 연락을 위해 공명단 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9년 4월 최양목·이선구(李善九)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4월 4일 평북 용천군에 거주하는 김인옥(金仁玉)으로부터 군자금 160원을 모금하고, 4월 20일 서울 교외의 망우리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탈취한 다음 동포들의 우편물을 제외한 일본인 우편물을 소각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일본군 19사단의 지원을 받고 경기·황해·강원·충북·충남 등 5도에서 차출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양주군 백봉산(白峯山)에서 일행 3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8년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여 평북 의주군 백마산성에서 화전민으로 생활을 했는데, 이른바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매년 12월이면 예비 검속되어 이듬해 1월에야 석방이 되므로 무랍인(無臘人)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964년 독립유공자상훈심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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