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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다른 표기 언어 Paleolithic Age , 舊石器時代

요약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보이는 문화단계 또는 수준을 가리키는 용어.
Old Stone Age라고도 함.

뗀석기(打製石器)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구석기·중석기시대 유적

한국 구석기·중석기 유적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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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구석기시대(약 250만~20만 년 전)의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인류선조라고 생각되는 화석과 더불어 간단하게 떼어 만든 자갈돌석기가 발견되고 있다. 좀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서 만든 찍개공작(Chopper chopping-tool industry)이라 불리는 전기 구석기시대 전통은 지구의 동반구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전통은 곧선사람(직립원인 : Homo erectus)이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발견된 바는 없으나, 당시의 곧선사람은 돌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뼈로도 도구를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70만 년 전 무렵, 새로운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인 주먹도끼(兩面石器 hand ax)가 나타났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주먹도끼는 프랑스 북부의 솜 강 유역에 발달한 아베빌리안 공작(Abbevillian industry)에 해당한다.

이보다 뒤늦게 세련된 솜씨로 제작한 주먹도끼 전통이 아질리안 공작(Acheulian industry)에서 보이며, 이런 증거는 유럽·아프리카·중동·아시아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주먹도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석기는 곧선사람의 화석과 함께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나왔다.

주먹도끼 전통과 더불어, 공을 들여 떼낸 격지를 바탕으로 특수한 석기를 제작했던 독특하고 색다른 성격의 석기문화가 나란히 발달하였다.

유럽에서 클락토니안 공작(Clactonian industry)은 격지전통의 한 예가 된다. 초기의 격지문화는 네안데르탈인 화석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무스테리안 공작(Mousterian industry)의 중기 구석기시대 격지석기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던 것 같다.

약 4만 년 전에 시작하는 후기 구석기시대는 지역에 따라 독특한 석기문화가 발전하였다.

유럽에서는 페리고르디안(Perigordian)·오리냐시안(Aurignacian)·솔뤼트레안(Solutrean)·막달레니안(Magdalenian) 공작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구대륙의 여러 곳과 신대륙의 가장 오랜 석기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엿보인다. 해부학상으로 현대인에 속하는 화석(크로마뇽인)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매우 복합적이고 전문화되었으며, 그 유형이 다양하였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예술전통이 독특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구석기시대의 예술품을 2가지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크기가 작은 조각품이며, 다른 하나는 동굴의 벽에 물감으로 그리거나 선으로 새기거나 또는 돋을새김[浮彫]한 거대한 예술품이다. 그러한 작품은 지중해 전역에 걸쳐 제작되었고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도 퍼져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동유럽을 비롯한 스페인과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 몰려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 동유럽의 예술전통은 주로 작은 조각품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예술품에는 진흙으로 빚어 만든 형체조각품과 뼈나 상아에 모양을 새겨서 만든 조각품이 있다. 이들 예술품은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다.

동유럽에서 나온 예술품에는, 돌과 찰흙을 가지고 간단하지만 사실적으로 표현한 짐승모습의 조각품과 돌에 여자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입체조각품이 있는데, 뒤의 것을 학자들은 비너스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양식화된 여인상은 땅딸막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성(性)과 다산(多産)에 관련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여인상은 풍만한 젖가슴과 과장된 엉덩이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예술품은 이른바 프랑스-칸타브리아 예술사조의 근거지인 서유럽에서 번성하였다. 이곳에 있는 석회암 동굴의 벽은 물감으로 그리고 선으로 새기며 돋을새김을 하는 데 적절한 면을 제공하였다. 이들 동굴은 질적으로 뛰어난 작은 조각품을 비롯해 진흙에 손가락으로 자국을 낸 간단한 그림에서부터 다채로운 빛깔을 이용하여 그린 세련된 회화작품에 이르기까지 선사시대 시각예술의 풍부하고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의 예술품은 생동감 넘치는 자연주의와 훌륭한 구도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동물을 묘사하였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에서 예술의 기능이나 목적이 무엇이었겠는가라는 문제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사냥의 성공을 보장하거나 또는 다산을 보증하는 주술의식의 증거로서 사람이나 짐승이 표현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구석기시대 예술가들이 짐승의 털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선사인들이 계절적인 표시방법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던 초기의 시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앞에서 제시한 예술의 실용성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 또다른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구석기인들의 예술을 단지 주위 세계의 여러 모습을 창조적으로 기록하고 재현하려는 기본적인 욕구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한국의 구석기시대

한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짜임새있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일찍이 1935년에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예전에는 종성군 동관진이라고 했음)에서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과 석기가 발굴된 바 있으나,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오랫동안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관진유적).

1940~50년대를 거치며 몽골, 옌하이저우[沿海州],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드러나면서 여러 학자들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선사문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1년 함경북도 화대군 장덕리에 있는 늪지의 이탄을 캐는 과정에서 털코끼리(맘모스) 화석이 발견되었다(→ 장덕리유적). 비록 이곳에서 석기와 같은 문화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 유적에서 얻은 발굴성과와 연구자료는 한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층 드높게 만들었다.

함경북도 선봉군(예전에는 웅기군이라고 했음) 굴포리 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뗀석기가 발견된 것은 1962년이었다.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층을 걷어낸 바닥의 붉은흙층에서 1점의 뗀석기를 찾았고, 이를 계기로 해서1963~64년에 걸쳐 굴포리의 구석기유적이 발굴되었다.

1964년에는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앞을 흐르는 금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이 유적에서 실시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가 30,690±3,000 BP와 20,830±1,880 BP로 나와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시대설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1966~70년에 발굴된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동굴유적에서는 쌍코뿔이·넙적큰뿔사슴·원숭이·하이에나같이 지금은 사라진 짐승화석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에는 평양시 상원군 청청암동굴과 황해도 평산군 해상동굴에서 갱신세의 짐승화석이 발굴되었다. 1970년대에는 평양시의 승호구역 화천동동굴과 만달리동굴 그리고 역포구역 대현동동굴, 평안남도 덕천시 승리산동굴, 충청북도 제원군의 점말동굴과 청원군의 두루봉동굴 및 샘골유적,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충주댐·주암댐·합천댐의 건설공사가 실시되면서 충청북도의 제원군 창내유적과 명오리유적, 단양군 금굴유적과 수양개유적 등과 전라남도의 승주군 우산리유적·금평리유적·대전리유적 등에서 많은 수의 구석기유적이 발굴되었다. 평양시 승호구역의 매리동굴, 상원군의 금천동굴 및 용곡동굴, 강원도 양구군 상무룡리유적, 경기도 연천군 금파리유적,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리유적, 전라남도 곡성군 주산리유적과 송산리유적 등이 1980년대에 발굴되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40여 군데가 넘는데, 이와 같은 유적은 높고 험난한 산악지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대체로 한데유적은 큰 강가나 큰 강의 물줄기 언저리를 중심으로 발견된다. 두만강·대동강·임진강·북한강·남한강·금강·보성강 일대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석회암 지대가 분포된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충청북도 등지에서는 동굴유적이 자주 나타난다. 때에 따라서는 함경북도 굴포리와 같이 바닷가 근처 또는 경기도 일산에서와 같이 높지 않은 언덕지대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함경북도의 강안리(동관진)유적을 제외한 한데유적에서는 짐승화석이 발견된 예가 없는데, 이것은 강가 주변의 퇴적이 산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 지역은 짐승뼈의 보존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반면에 석회암지대의 동굴퇴적은 알칼리성을 띠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짐승뼈의 보존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석회암 동굴유적에서는 여러 종류의 짐승뼈가 잘 화석화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유적에서 나오는 짐승뼈화석을 통하여 우리는 그때의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구석기인들의 사냥 방법을 비롯하여 그들의 살림살이 모습을 연구, 복원해낼 수 있다.

현재까지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방이나 랴오닝 성[遼寧省]에서 이루어진 구석기유적의 발굴조사 자료를 검토할 때, 한반도에도 이른 시기부터 구석기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곧선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시리유적에서 나온 사람화석의 머리뼈에서는 곧선사람에서 옛슬기사람으로 넘어가는 특징이 관찰되고 있어 주목된다.

중기 구석기시대의 사람화석은 승리산 동굴과 대현동의 동굴유적에서 발굴되었는데, 앞의 것은 '덕천사람' 그리고 뒤의 것은 '역포사람'이라고 각각 불리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르러 이땅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화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용곡 동굴유적의 '용곡사람', 승리산 동굴유적의 '승리산사람', 만달리 동굴유적의 '만달사람', 금천 동굴유적의 '금천사람', 두루봉 흥수굴유적의 '흥수사람' 등에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생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동굴은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부터 선사인들의 살림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동굴이 아닌 야외에서 구석기시대의 집터가 발견된 예는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집터가 보고된 유적은 현재까지 없다.

굴포리의 아래층(굴포문화 1기층)에서 막집자리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된 바 있다. 석장리와 창내의 한데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집터가 발굴되어 집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창내유적에서 나온 화덕자리는 자갈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한편 수양개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석기제작 장소로 활용된 여러 곳에서 몸돌·망치돌·모룻돌을 비롯하여 수많은 격지가 널려 있는 상태로 나타났다(→ 수양개유적). 이 유적에서 나온 격지 가운데는 서로 부합되는 것들이 많아 석기를 만드는 과정까지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금까지 발굴·보고된 구석기시대 유적의 정확한 시대설정에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해결되지 못한 여러 문제가 적지 않게 깔려 있다.

따라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체계를 짜임새있게 확립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분석자료와 연구성과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보고된 금굴유적 아래층, 석장리유적 아래층, 전곡리유적 등에서는 찍개·주먹도끼·여러면석기와 함께 긁개·톱날과 같은 격지석기들이 많이 나왔다. 전곡리유적에서 나온 여러 형태의 주먹도끼와 자르개는 이 유적의 문화성격을 강하게 나타내준다.

중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석장리유적의 가운데층과 상무룡리유적의 아래층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북한강 상류에 자리잡은 상무룡리유적에서는 찍개·여러면몸돌 등의 크고 무거운 석기와 함께 잘 다듬어 만든 여러 종류의 격지석기가 나왔다. 짐승화석이 많이 발굴된 점말동굴의 중기 구석기문화층에서는 간단한 잔손질을 베풀어 만든 뼈도구가 발견되었고, 전자현미경조사를 통하여 각 뼈도구의 쓰임새까지 복원된 바 있다(→ 점말동굴유적).

한국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유적지는 여러 곳이 있다.

한데유적으로는 굴포리유적·석장리유적·상무룡리유적 등의 위층과 창내유적·수양개유적 등이 있으며, 동굴유적으로는 만달리·용곡리·중리·흥수굴을 비롯하여 점말·금굴·승리산 동굴유적의 위층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에서 드러난 집터·사람화석·짐승화석·석기·뼈연모·예술품 등에 관한 자료는 한국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긁개·톱날·밀개·새기개와 같은 격지석기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수양개유적이나 만달리유적에서 보이는 돌날몸돌떼기의 기술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발전된 석기제작수법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용곡동굴유적에서 발굴된 짐승 머리 모양 예술품은 뼈를 납작하게 갈아 만든 조각품(길이 25㎜, 너비 26㎜, 두께 2.5㎜)이다.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먹거리로 사냥한 짐승으로는 코뿔이·하이에나·늑대·곰·멧돼지·노루·사슴·말·소·오소리·너구리·토끼 등이 있다.

때에 따라서 구석기인들은 원숭이까지 잡아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짐승 중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전기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즐겨 잡아먹었던 종류는 사슴이나 노루와 같이 순한 초식성 짐승이었다.

우리는 현재 한국의 후기 구석기시대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중석기시대로 전환되었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강원도 홍천군의 하화계리에서 중석기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굴된 바 있어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성과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하화계리유적).

석장리 구석기 축제 모습

충남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동 구석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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