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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전국학생단체 대표 47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자는 춘곡, 호는 덕재.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2월, 손병희(孫秉熙), 이갑성(李甲成) 등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되어 3·1운동 계획을 지시받았다. 이어 김성득(金性得), 김형기(金炯機), 김문진(金文珍), 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학생들의 시위 참여에 대한 연락책임을 맡아 서북친목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을 규합하였다. 이갑성에게서 독립선언서 1,500매를 받아 각 학교에 배부하였으며 3·1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 항의하는 한편, 김원벽과 함께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이후 3월 4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각 전문학교 학생 지도급 대표와 장채극(張採極), 전옥결(全玉玦), 강우열(康禹烈) 등 중등학교 대표들과 함께 서울학생 제2차 만세시위 계획을 세웠으며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 경찰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시위인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간 복역했고, 1930년대에는 신간회 해소파에 속해 중앙집회위원회 위원,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초대 함경남도지사, 함경남도민회장, 1948년 조선정치학관(지금의 건국대학교)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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