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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시기 |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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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
대학시절 영화를 공부할 때 고바야시 마사키의 〈하라키리〉(1962년)라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것은 잭 앨리스(Jack C. Allice)의 《세계영화사》라는 책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사무라이 영화의 걸작이자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고, 막상 영화는 구하기 어려워 보지 못했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저 구로사와 영화의 아류겠거니 짐작만 했다.
몇 년 전 마침내 이 작품을 직접 보게 되었는데,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걸작이었다. 구로사와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이지만, 고바야시 감독이 지닌 역사와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출력은 그에 못지않았다. 그야말로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에 이은 또 한 사람의 일본 영화 거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하라키리〉라는 영화가 나에게 준 감흥은 대단했다. 나중에 자료 조사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일본영화비평가협회 투표에서 역대 최우수영화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일본 내에서도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은 도쿄 와세다 대학에서 고대미술과 철학을 전공한 화가 지망생이었다가 영화판에 뛰어들어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각주1) 의 조감독 생활을 거쳐 데뷔했다. 데뷔작 〈아들의 청춘(息子の靑春)〉(1952년)은 스승 기노시타의 영향력이 묻어나는 서정적인 홈드라마다. 그후 작가주의적 성향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징병되어 만주, 태평양 등을 종군하며 전쟁의 쓰라림과 휴머니즘 붕괴를 생생히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대서사 영화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1, 2, 3부(1959~1961년)를 만들면서부터다. 〈인간의 조건〉은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특유의 심각한 철학적 주제를 엄격한 형식미와 미장센으로 절묘하게 접목시킨 걸작 〈하라키리〉, 전통 일본 미술에 대한 애정이 어우러진 새로운 탐미적 경향을 보여준 〈콰이단(怪談)〉(1964년)각주2) , 그리고 봉건제의 위선을 고발한 〈사무라이의 반란(上意討ち拜領妻始末)〉(1967년) 등을 만들었다.
고바야시 감독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하라키리〉는 기본적으로 사무라이의 핵심요소 중 하나인 할복(割腹)각주3) 과 검술 액션을 다루고 있기에 사무라이 영화에 속할 것이다. 서구적 장르 카테고리에 넣자면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사회비판 영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엮어가는 복합구성 방식이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복합구성은 스토리의 흐름을 끊고 다소 지루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은 구성이 오히려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주제를 강화시켜 나가는 힘이 있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도쿠가와 막부 초기인 1630년경이다. 당시는 각 영주들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던 내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무라이 한 사람이 이이(井伊) 가문이라는 명망 있는 사무라이 가(家)의 대문으로 들어서는 데서 영화가 시작된다.
츠쿠모 한시로(나카다이 다쓰야 분)라는 사내가 전란에서 영주를 잃고 주인 없는 사무라이로 가난하게 떠돌다 명예롭게 죽고자 할복할 장소를 제공해달라고 온 것이다. 하지만 이이 가문의 수석고문인 사이토 카게유는 그런 제안을 귀찮아한다. 최근에 수많은 사무라이가 같은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어떤 가문에서 그들을 동정해 가신으로 받아들인 바 있기에 다들 그런 기대를 하고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시로에게 얼마 전 비슷한 목적으로 찾아온 한 사무라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지이와 모토메라는 젊은 사무라이가 가난 때문에 동정받을 것을 염려하고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찾아왔다가 정말 할복을 허락하자 당황해서 도망가려는 것을 붙잡아 강제로 할복시켰다는 이야기다. 모토메는 도망가려다가 잡히자 하루 이틀만 유예를 달라고 간청했으나 가문에서 허락하지 않고 결국 그가 가져온 대나무 검으로 강제로 할복시켰다고 이야기해준다. 수석고문 사이토는 한시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의연하게 자신은 정말 할복할 결심에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이토는 할 수 없이 수하들에게 할복을 허락하고 준비시킨다.
한시로는 할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보조[카이샤쿠닌(介錯人), 할복할 때 뒤에서 무사의 머리를 베어주는 사람]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오모타카라는 사무라이를 지명한다. 사이토는 그를 찾지만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토는 부하에게 무슨 영문인지 집에 가서 알아보라고 심부름시킨다. 그러자 한시로는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사이토가 꺼리자 한시로는 "오늘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라고 해도, 내일은 당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사이토가 이야기한 젊은 사무라이 모토메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모토메라는 젊은 사무라이는 한때 동고동락했던 친한 친구가 자결하기 직전에 자신에게 맡긴 아들이자 자신의 딸과 결혼한 사위라는 것이다. 그 말에 사이토와 가신들은 모두 놀란다. 그 무렵 심부름을 간 부하가 오더니, 오모타카가 몸이 아파서 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한시로는 대신 하야토라는 무사를 불러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도 몸이 안 좋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무사 가와베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사이토와 가신들은 따로 모이더니 '분명히 저 놈이 뭔가 최후의 수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사이토는 일방적으로 보조를 지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시로는 자기가 원하는 세 사람 중 한 명이 아니면 할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때 한시로는 다시 과거의 회상을 이어간다. 사위인 모토메는 딸이 아픈데도 치료할 돈이 없어 돈을 구하러 다니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이이 가문에서 돈을 얻을 생각으로 할복을 가장해 갔다가 결국 시체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건으로 사위는 죽고, 손녀도 병으로 죽고, 딸은 자살하고, 자신은 혼자가 되었다는 사연이다.
이야기를 마친 한시로는 모토메의 할복을 무자비하게 다룬 이이 가문을 질책한다. 왜 하루 이틀 여유를 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지 못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수석고문 사이토는 그것은 사무라이로서 비겁하고 이기적인 변명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사무라이의 명예는 겉치레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한시로. 거기에 대해 사이토는 "우리 이이 가문에서 무사의 명예는 겉치레가 아니오!"라고 큰소리친다. 그 말에 한시로는 크게 비웃는다. 그는 이이 가문이 잘못된 방식을 스스로 깨닫고 사과해주길 기대했지만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보고 할복하겠다고 말한다. 그 전에 이 집에 속한 물건을 돌려주겠다며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던진다. 그것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오지 못하겠다고 말한 세 사무라이들의 상투였다. 그걸 보고 놀라는 사이토와 가신들. 사실 그 세 명의 가신들은 모토메에게 강제로 할복을 시킨 장본인들이었다.
뒤이어 한시로는 엿새 전부터 한 명씩 찾아다니며 결투를 한 뒤 상투를 잘라온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를 끝내고 그는 "결국 이이 가문조차 사무라이의 명예는 허울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라며 비웃는다. 사이토는 분노하며 '미친놈'이라고 말한 뒤 부하들에게 "저놈을 죽여라!"라고 명령을 내린다. 한시로는 그의 가신들과 혈투를 벌이다 결국 그들이 쏜 조총에 맞은 후 할복을 한다. 하지만 그는 할복하기 전에 이이 가문의 가신 네 명을 죽이고 여섯 명은 중상을 입힌 데다 가문의 상징인 투구를 집어던져 버린다.
한시로가 죽고 나자 사이토는 가신들에게 명한다. 츠쿠모 한시로는 명예로운 할복을 했고, 부하들의 죽음은 그와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공표하라고 말이다. 그때 가신 한 명이 와서 상투 잘린 한 가신이 자살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사이토는 살아있는 나머지 두 가신에게도 할복을 명한다. 대신 그들은 모두 병으로 죽은 것으로 꾸미라고 명령한다. 사이토는 결국 모든 걸 숨기고 거짓 명예를 지키고자 하고, 이이 가문은 단호하고 명예롭게 사무라이들을 운용했다고 거짓 기록되는 데서 영화는 끝난다.
권력자의 위선적 태도 고발
지금까지 '할복'은 주로 일본적인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할복이 '가미가제(神風)'라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또한 다수의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 그런 행위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바야시는 영화 〈하라키리〉를 통해 할복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는 주인공인 츠쿠모 한시로의 입을 통해 '사무라이의 명예는 겉치레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사무라이들의 할복이란 영주나 권력자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 그리고 부하들을 다루기 위해 사용한 거짓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바야시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 사이토가 가난한 사무라이 츠쿠모 한시로로 인해 자신의 부도덕함과 불명예가 드러나고 모욕을 당했음에도, 정작 자신은 할복하지 않고 모든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덮어버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걸작으로 꼽힌 이유는 시공을 초월한 주제의 공감대에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몬(羅生門)〉(1950년)이 '진실의 상대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서양인들의 공감을 얻었다면, 이 작품은 '권력자는 위선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라는 주제로 공감을 얻고 있다. 〈하라키리〉에서 보이는 권력자의 위선적인 태도가 현대의 정치나 권력구조에도 얼마나 많은가? 사이토처럼 모든 진실이 담장 너머로 나가지 못하게 숨기고 거짓 무용담을 퍼뜨려 명예를 유지하려는 집단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휴머니즘을 추구했던 고바야시 감독은 〈인간의 조건〉각주4) 과 〈하라키리〉 이후부터 사회제도의 불합리함과 인습, 그리고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특히 그는 전쟁이라는 절대 악을 경험한 다음부터는 자신의 영화 〈인간의 조건〉 주인공처럼 '광기의 시대에 진지하게 삶을 살려고 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이 영화에서 뛰어난 것은 주제뿐 아니라 주제와 인물을 드러내는 스토리 전개방식, 즉 구성에 있다. 한 인물이나 사건의 비밀을 서서히 드러내는 복합적인 구성 방식은 〈시민 케인(Citizen Kane)〉(1941년), 〈라쇼몬〉 등과 유사하다. 〈하라키리〉에서는 이이 가문에 등장한 미스터리한 떠돌이 사무라이, 그리고 회상을 통해서 서서히 밝혀지는 그 남자의 비밀, 그의 감춰진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강화되는 사무라이와 이이 가문 가신들과의 긴장 관계가 매우 밀도 있다.
구성은 초반에 미스터리를 기반으로 시작한다. 즉, 주인 없는 사무라이가 한 가문에 등장해 할복하겠다고 하는데, 왜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인가? 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미스터리의 시작이다. 그 미스터리는 이내 풀리는 듯하다. 즉, 자신의 사위가 억울하게 이이 가문의 무자비한 강제 할복에 의해 희생되었기에 복수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왜 그는 자신의 할복 보조(카이샤쿠닌)로 특정 무사 세 명을 고집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모두 몸이 아프다고 출근하지 않았을까? 물론 대충 유추할 수는 있다. 한시로의 카리스마로 볼 때 그들 모두 한시로에게 당했을 거라는 짐작이다. 하지만 그들과 한 일대일 결투에서 상투를 자른 사실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이이 가문의 위선을 까발리는 장면은 매우 통쾌하다.
〈하라키리〉의 스토리 구성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도입
① 이이 가문에 사무라이 츠쿠모 한시로의 등장—마당에서 할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함.
② 이이 가문 수석고문 사이토의 비슷한 선례 이야기(회상)—지지이와 모토메라는 젊은 사무라이가 찾아와 위장 할복을 요청했다가 허락하자 도망치려는 걸 협박해 강제 할복시킴.
발단
③ 츠쿠모 한시로, 그 이야기 듣고도 할복 결심—사이토가 할복을 허락하나 한시로는 카이샤쿠닌으로 자신이 지명한 사람을 써줄 것을 조건으로 내걺. 그 사람이 안 보이자 사이토는 부하를 보내 데려오게 함. 그 사이에 한시로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요청. 얼마 전 여기서 할복한 모토메는 자신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자 모두 놀람.
전개
④ 츠쿠모 한시로의 회상—모토메는 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자신의 딸과 결혼한 사위라고 하며 그 과정을 회상을 통해 설명함.
⑤ 한시로와 이이 가문의 대립—사이토는 한시로가 지명한 세 명의 가신 모두 병들거나 부재중이라 일방적으로 카이샤쿠닌을 지정하려함. 한시로는 그들이 보조하지 않으면 할복할 수 없다고 고집하며 갈등을 벌임.
⑥ 한시로의 회상—한시로는 모토메와 자신이 왜 여기 올 수밖에 없었는지 회상을 통해 이야기함. 전쟁에서 패하고 주인 없는 사무라이가 된 후 구차한 자신의 삶, 사위와 딸과 병든 손녀가 죽은 후 혼자가 된 이야기.
⑦ 한시로의 이이 가문에 대한 질책, 그리고 이이 가문 무사들의 불명예 폭로—한시로는 왜 모토메가 부탁한 하루의 유예를 주는 관대함을 베풀지 않았느냐고 질책함. 그리고 병을 핑계로 오지 않은 이이 가문 무사들의 잘린 상투를 꺼내 던짐. 그리고'당신네 잘난 사무라이들의 명예는 겉치레일 뿐이다.'라고 비웃음.
절정
⑧ 한시로와 이이 가문 사무라이들의 일대일 결투(회상)—한시로가 사위 모토메를 강제로 할복시킨 세 명의 무사들을 찾아가 결투를 벌여 그들의 상투를 자른 이야기.
위기
⑨ 한시로와 이이 가문 가신들의 혈투, 그리고 한시로의 할복—모욕당한 사이토는 가신들에게 한시로를 죽이라고 명령함. 한시로는 혈투 끝에 그들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에서 할복해 죽음.
결말
⑩ 이이 가문의 사이토, 사건 처리 위장—사이토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한시로는 그냥 할복해서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가신들에게는 할복을 명함. 그리고 한시로 사건을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쌓는 데 역이용함.
이와 같은 〈하라키리〉의 구성 방식은 주제를 극적으로 표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가령 똑같은 스토리를 시간 순서대로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모토메와 한시로의 딸이 결혼하고 궁핍하게 살다가 모토메가 돈 때문에 할복을 가장해 이이 가문에 찾아가고, 거기서 모토메가 강제 할복을 당한 후, 그 사실을 안 한시로가 복수하러 이이 가문에 찾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너무 상식적인 복수 영화로 끝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정통 사무라이 영화의 서사 대신 복합적인 구성으로 미스터리와 스릴러적인 장르 요소를 도입해 동일한 주제를 훨씬 강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얻었다.
이 작품에서 옥에 티가 있다면 한시로와 이이 가문 가신들이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이다. 앞에서 일대일로 상대하는 결투 장면은 무난했지만, 혼자서 많은 사무라이들을 상대하는 혈투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고 어설프게 연출되었다. 여러 명의 가신들이 혼자서 발악하는 한시로를 포위한 상태에서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저 머뭇거리며 서 있는 게 어색해 보인다. 칼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총을 쏴서 죽이려고 한 것도 좀 비현실적이다. 고바야시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주제나 시각적 표현 면에서 자주 비교되고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지만, 액션 연출만큼은 선배 거장을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의 완성도에 가장 공헌한 사람은 당연히 고바야시 감독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시나리오 작가 하시모토 시노부(橋本忍)의 공도 매우 커 보인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몬〉과 〈산다는 것(生きる)〉(1952년), 그리고 〈칠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1954년) 시나리오를 공동 작업한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하라키리〉의 독특한 구성 방식이나 인물 간의 미묘한 대립구도와 긴장감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가 전작들에서 발휘한 재능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고바야시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미조구치 겐지만큼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는 이후 작품 〈사무라이의 반란〉각주5) 에서도 봉건제도의 불합리함과 인습의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비판을 가한다. 작품으로만 판단하건대, 그는 일본 역사와 정신 내부의 부끄러움을 성찰하는 매우 양심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포장만 휴머니티가 아니라 내부 깊숙이 휴머니티와 진실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예술가란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감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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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스릴러·공포·엽기 영화에서 멜로·로맨틱코미디·휴먼 영화까지 흥미진진한 영화의 세계. 단순한 작품 해설과 감상이 아닌, 현장 감독으로서의 시선과 해석을 담았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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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하라키리 – 영화는 쉬지 않는다, 이정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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